지난 7일 관훈토론회에서 만난 유력대선주자인 박근혜와 문재인이 날선 공방을 펼쳤다. 박근혜는 문재인에게 “도대체 정치 철학이 뭔가.”라고 물었다 한다. 문재인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표적인 비서실장이었기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이 추구하는 가치나 정치철학, 정책에 대해 가장 잘 알 수 있는 분”인데도, “최근에 보면 노 전 대통령이 국익을 위해 추진했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라든가 제주해군기지에 대해 반대하는 부분이 좀 이해하기 어렵다.”라는 것이다.

▲ 8일 한겨레 5면

대체 무슨 정치철학을 말하나?

여기서 박근혜가 말한 사례들에서 굳이 정치철학 비슷한 것이라도 추려 본다면, ‘부국강병(富國强兵)’에 대한 얘기일 것이다.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고 군대를 강하게 하자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한 국가들의 기본적인 목표였고, 오늘날에도 박근혜와 문재인이 대결하고 있는 보수정치의 수준에선 이견을 제기할 수 없는 원칙일 게다.

그렇다면 박근혜는 한미 FTA를 반대하고 제주해군기지에 반대하는 것은 부국강병을 거스르는 일이라 생각할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한국 보수주의자들은 정치적 반대파에 대해, 그들이 일부러 ‘빈국약병’을 추구해 북한에 의해 남한을 멸망케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믿으니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문재인이 대놓고 그런 주장을 하는 게 아니라면, 우리가 따져야 할 건 부국강병 자체는 아니고 그것을 위한 방법론이다. 가령 대부분의 한미 FTA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잘 먹고 잘 살자는데 반대하는 게 아니라 이 조약을 체결하면 국민 대다수의 복리후생이 감소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과 논쟁하려면 "잘 먹고 잘 살자는데 왜 반대해?"라고 말하면 안 되고 한미 FTA의 효과에 관해서 구체적인 논쟁을 해야 한다.

따라서 박근혜가 문제삼은 건 정치철학의 문제라기보다 ‘일관성’의 문제다. 물론 정치인에게 일관성은 대단히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이유는 유권자가 정치인이 무엇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다. 정치인은 주장한 정책을 수정할 때에, 왜 수정하려 하는지 유권자들에게 자세한 설명을 할 필요가 있다. 그게 '일관성'이란 덕목이 말하는 정치인의 의무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 일관성 자체가 결정적인 원칙이 된다 주장한다면 코미디가 생긴다. 세상사가 어떻게 변하든 말든 정치인은 선거 때 자신이 약속한 대로만 하면 된다는 식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런 상황을 이명박 정부 내내 겪었다. 미국발 금융위기라는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회의 혹은 재편을 요구하는 대사건이 발생했음에도, 한국 정부는 2007년 선거 때 약속한 공약을 그대로 이행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선 박근혜의 책임이 분명히 있다. 2007년 박근혜가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트레이드 마크로 내걸었던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운다)를 경선 이후 이명박이 대폭 수용했기 때문이다. 감세정책을 펼치면 기업이 잘 되고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가 일어나 성장률이 높아지고 서민생활도 안정된다는 게 ‘MB노믹스’의 기조 아니었던가. 이것은 박근혜의 ‘줄·푸·세’의 이념과 정확히 일치하는 바다.

야당이 내거는 “MB 정권·박근혜 공동책임론”이 설득력이 생기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박근혜는 관훈토론회에서 이 사실을 부정하며, "저를 당 안팎에서 여당 내 야당이라고 부르면서, 특히 야당은 박근혜 답하라고 말해왔지만 저는 제 생각을 거의 다 얘기해 왔고 중대한 문제들에 대해 제 입장을 밝혀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근혜가 여당에 이견을 제시한 사례들, 그녀가 스스로 밝힌바 광우병 촛불시위, 미디어법, 세종시, 동남권 신공항 등은 제각기 중요한 문제들이긴 하지만 앞서 말한 경제기조의 문제는 아니다. 박근혜는 이명박의 감세정책이나 재벌기업을 위한 고환율 정책에 대해선 이견을 제시한 적이 없다.

그러니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 대다수 나라들이 재정건전성을 위한 부자증세를 고민할 때, 선거 때 약속한 감세와 토건사업을 일관성 있게 밀어붙여 민생을 훨씬 더 어렵게 한 이명박 정부 경제정책에 대해 박근혜도 절반 이상의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는가? 박근혜는 남의 철학을 얘기하기 전에 자신이 제시한 정책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부터 봐야 한다.

▲ 8일 경향신문 5면

박근혜는 민주주의를 이해하는가?

한편 박근혜의 공세에 대한 문재인의 반격의 주요한 논점은 ‘소통과 민주주의’였다. 문재인은 "한미 FTA나 제주해군기지나 국민들이 문제를 제기하면 귀를 열고 소통하면서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나의) 정치철학"이라며 "거꾸로 그냥 무시하고 마구 밀어붙이는 것이 박 위원장의 정치철학인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문재인은 한미 FTA에 대해서 "독소조항이 있으니 재협상을 통해 독소조항을 삭제 또는 수정해야 한다"고 했고, 제주 해군기지는 "(입지 선정·군항전용 등) 반대 이유에 귀를 열어야 되고 공론을 모아야 한다. 1~2년 지체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문재인은 "박 비대위원장은 유신체제 시절의 독재와 인권유린에 대해 한 번도 잘못된 것이 있다고 시인한 적이 있느냐"며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소신이 있는지 거꾸로 제기하고 싶다"고도 했다.

여기서 문재인은 ‘부국강병이란 같은 목적을 향한 방법론’의 차원과 다른 새로운 차원을 끌어온다. 바로 ‘민주주의’다. 부국강병이 동서고금 모든 나라의 목표였다지만 우리가 왕조국가가 아닌 민주주의 국가를 사는 이상 ‘소통과 민주주의’의 문제도 생각해야 한다. 문재인은 바로 그 점을 지적했다.

물론 내가 보기에 문재인의 답변도 만족스럽지는 않다. 그 내용이 틀렸다기보다는 참여정부 시절의 문제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재인은 참여정부가 소통을 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서용교 새누리당 수석부대변인의 재반박이 더 설득력 있다. 그는 "한미 FTA와 제주해군기지 모두 노 전 대통령이 추진할 때도 많은 토론과 반발, 시위가 있었음에도 국익을 위해 추진했다"며 "그때 추진한 것은 국민의 소리에 귀 기울인 것이고 지금 정부에서 추진하는 것은 소통을 거부하는 것인가"라고 되묻는다.

결국 부국강병, 혹은 국익 담론이 민주주의의 요구를 쉽사리 진압하는 것은 참여정부에서나 이명박 정권에서나 마찬가지였다는 얘기다. 물론 이 부분에 있어 상대적인 차이는 있다. 가령 용산참사 희생자들에 대해 이명박 정부 하에선 경찰총장의 사과도 없었지만 참여정부 시절 전경에 의해 농민이 사망했을 때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과를 했다. 그러나 참여정부에서도 시위대가 죽었을 때 경찰이 그 책임을 부인하는 경우는 많았다. 또 ‘차이’가 꼭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도 않았다. 참여정부 시절 문제가 된 대추리나 부안이 오늘날 문제가 되었다면, 야당지도부가 개입해서 물리적 충돌을 줄이고 조금이나마 더 나은 합의를 이끌어냈을 확률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재인의 답변이 부족하단 것과 별개로 ‘소통과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제기가 박근혜측이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부분인 것은 분명하다. 사실 우리는 ‘정치인 박근혜’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에 대해 별로 평가할 자료가 없다. 그런데 이 경우엔 박근혜 지지자들이 자랑하는, ‘어려서부터 권력의 핵심에서 정치를 배운 박근혜’가 문제가 된다. 정치학자 고 전인권 박사의 <박정희 평전>에 따르면, 박정희는 민주주의에 대해 아무런 이해가 없었다는 점에서 반민주주의라기보다 차라리 무민주주의자 내지 몰민주주의자에 해당한다. 우리는 이게 박정희만의 문제가 아닌, 한국 사회의 많은 기성세대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박근혜를 이 문제를 극복했는가? “그렇다.” 혹은 “아니다.”로 대답하려면 자료가 필요한데, 이를 판단할 수 있는 사례는 많지 않다.

그런데 나는 이런 상황 자체가 박근혜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에 머무르고 있다는 추정을 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정황증거라고 본다. 만일 박근혜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자신의 아버지에게 그런 것이 없었단 걸 쉽게 알았을 것이고, 국민들 앞에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이해 및 감수성을 자랑하려 들었을 것이다. 국민들의 상당수는 혹시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박근혜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의 문제에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이제껏 그 사실을 몰랐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만일 박근혜가 문재인의 공격을 확실하게 막아내고 싶다면, 어서 자신의 민주주의에 대한 탁월한 이해에 대해 자랑질에 나서야 한다.

‘무서운 박근혜’, 국민에겐 친절할 수 있나

그러나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박근혜에게 그 분야에서 자랑질할만한 무언가가 있는지 의문이다. 문재인은 "박 비대위원장은 유신체제 시절의 독재와 인권유린에 대해 한 번도 잘못된 것이 있다고 시인한 적이 있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서용교 수석부대변인은 "과거 박 위원장은 아버지 시절에 본의 아니게 피해 입은 사람들에게 죄송하다는 발언을 여러 번 했다"고 답변했다.

그런데 사과의 시점이 문제다. 90년대 중반에 정치권에 입문한 박근혜는 2천년대 초반까지는 위에 언급한대로 포괄적인 사과를 했었다. 그런데 이 사과는 포괄적인이란 점에서도 문제가 되지만 최근에 나온 적이 없는 사과다. 박근혜는 최근의 문제제기에 대해선 예전에 사과를 했기 때문에 해당사항이 없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정말로 해당사항이 없을까. 박근혜는 2005년 12월 인혁당·민청학련 사건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과장됐다는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발표에 “한마디로 가치가 없는 것이며, 모함”이라고 불쾌감을 표시했다. ‘본의 아니게 피해 입은 사람들’의 범주에 인혁당과 민청학력을 넣지 않는단 것도 문제지만,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모함 운운하는 건 더 큰 문제다. 이 부분만 본다면 박근혜의 정치철학은 결국 국가를 운영하다보면 ‘본의 아니게’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선 나중에 한 두번 ‘사과’를 하면 그만이란 식이 아닐까?

인혁당이나 민청학련은 과거라 하더라도, 박근혜가 보여주는 정치행보 역시 ‘정치철학’과는 상관없이 섬뜩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회창 대표 시절 미래연합으로 분가해 갔다 큰 재미를 못 보고 복당한 박근혜는, 경험의 교훈을 받아들여 이명박에게 대선후보를 물먹은 다음에도 절치부심·와신상담하며 때를 기다려 왔다.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분통을 터트렸지만 미래연합 때처럼 당을 뛰쳐나가진 않았고, 조용히 이명박 정권의 실정을 기다리며 한 두마디 발언으로 이삭 주워먹기를 하면서 영향력을 넓혔다. 결국 오늘날에 와선 2008년의 ‘공천 학살’을 반대방향으로 재연했고 젊은 비대위원 이준석에게 ‘변절자’라 불린 전여옥 의원에게도 본때를 보여준 참이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반대세력에게 “한번 혼내준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아버지만큼 사람을 가두고 죽이진 못하겠지만, 인권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원칙없이 그때 그때 정치적 이득이 되는 걸 취하는 행동이 몇 사람에게나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힐지 두렵다.

문재인은 “박 위원장의 정치철학은 권위주의적”이라 비판했지만 결국 박근혜의 원칙(?)은 일종의 기회주의인 셈이다. 권력이 없을 땐 굴신을 하다가도 나중에 권력이 자신에게 왔을 땐 자신을 괴롭히던 인물들을 신속하게 처리하는 행동은 ‘권위주의’란 말로만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일종의 ‘잔인한 기회주의’라고 칭할 수도 있겠는데, 물론 전근대 동아시아 전통으로 본다면 ‘제왕학적 수련을 닦은 용인술’이라 칭송할 수도 있겠다. 박근혜가 어려서부터 '박정희의 청와대'에서 갈고 닦았다 ‘찬사’받는 ‘정치적 능력’이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정적들에게 무서운 박근혜는, 국민들에겐 친절할 수 있을까? 물론 민주주의 감각이 있는 정치인이라도 정적에겐 잔인할 수 있지만 박근혜 경우엔 정치인과 국민을 다르게 보는 기준 자체가 없는 것 같으니 문제다. 세종시나 동남아신공항 등 지역민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는 문제엔 발언해도, 민간인 불법사찰 문제 등엔 침묵하는 그녀의 ‘정치철학’을 신뢰하기 어려운 이유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