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로 기억합니다. 당시 대전 시티즌은 승부조작 사태로 가장 많은 선수들이 연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가장 큰 후폭풍을 겪었습니다. 시즌 초반 선두로 치고 올라서면서 좋은 분위기를 가져왔던 대전은 순식간에 순위가 곤두박질쳤고, 이에 대한 팬들의 시선은 싸늘했습니다. 많은 선수들의 승부조작 가담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전 시티즌 전체가 '범죄 팀'이라는 오명을 쓸 수밖에 없었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 골키퍼 최은성. 이 유니폼을 입고 은퇴하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돼 안타깝다. ⓒ 대전 시티즌 자료
하지만 이를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린 역할을 한 선수가 있었습니다. 진정성 있는 자세는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여준 이는 베테랑 골키퍼이자 대전 시티즌 한 팀을 위해 15년동안 헌신했던 사나이, 최은성이었습니다. 최은성은 리그 12라운드 전북 현대와의 경기에서 2-3으로 역전패한 뒤,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오늘 살기 위해 뛰었습니다"라면서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고 기자회견장을 숙연하게 했습니다. 대전 시티즌만을 바라보고, 대전 시티즌을 위해 뛴 선수가 흘린 눈물은 충분히 이해할 만 했고, 진정성 있고, 절박함을 느끼게 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최고참 선수의 이러한 모습에 많은 팬들의 격려가 쏟아졌습니다. 역시 '대전의 레전드다웠다'는 말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대전을 사랑했던 선수이기에, 정말 명예롭게 은퇴할 줄 알았습니다. 대전 뿐 아니라 K리그 전체적으로도 한 팀을 위해 이렇게 오랫동안 헌신했던 선수가 없었기에, 이대로 쭉 가서 은퇴를 한다면 충분히 좋은 대접을 받고 제2의 인생을 개척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꼭 그러고 싶어했던 최은성을, 대전 구단은 내치다시피 했습니다. 겨우내 몸을 만들기까지 했던 그에게 합당한 대접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최은성은 마음 속 깊은 상처를 입었고, 결국 팀을 떠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갑작스런 최은성의 퇴단에 대전 팬들의 분노는 이만저만이 아니고, 아쉬움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좋은 역사를 만들 수 있었던 기대도 물거품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최은성은 그야말로 '대전의 역사'와도 같은 선수입니다. 대전 시티즌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지난 해까지 언제나 골문은 그가 지켰습니다. 대전이 2001년 FA컵 우승을 차지했을 때, 2007년 6강의 기적을 쐈을 때도 수문장은 그였습니다. 영광과 좌절을 한꺼번에 경험했던 그였기에 대전에서 은퇴할 것이라는 기대는 누구나 갖고 있었습니다. 15년이라는 세월동안 한 팀에서만 뛴 선수가 거의 없었기에 잘만 했다면 대전의 좋은 역사가 될 수 있었고, K리그 전체적으로도 아주 좋은 선례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축구 문화의 좋지 못한 풍토에 최은성마저 희생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통상 대다수의 노장 선수들이 막바지가 돼 구단과 마찰을 빚어 등 떠밀리듯이 팀을 떠나는 면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해 아쉽게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프로의 세계가 냉정하고, 때가 되면 마무리할 줄 아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꾸준하고 철저한 자기 관리로 선수 생활을 이어가려는 의지를 보인다면 이에 대한 합당한 대우를 해줘야 함이 마땅합니다. 해외에서는 이런 문화가 잘 돼 있어 팀을 위해 헌신한 선수라면 이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는 것이 정착돼 있습니다. 하지만 최은성은 결국 이런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구단은 그를 삭감한 연봉에 성과급까지 제외시켰고, 구단 사장은 선수등록 마감일에서야 선수를 보고는 문전박대를 했습니다. 15년동안 팀을 위해 헌신한 '프랜차이즈 스타'에게 이런 대접을 한 것은 본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 뿐 아니라 잘 모르는 남이 봐도 참 이상한 모양새인 게 사실입니다.

이전에 몇 차례 언급하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의 선수 은퇴 문화가 아직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프로스포츠가 이땅에 들어온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선수를 명예롭게 대우해주고 마무리짓는 문화가 정착돼 있지 않은 것은 질적 성장을 추구하는 면에서도 별로 좋지 않은 일입니다.

대전 구단은 기회를 스스로 차버린 격이 됐습니다. 그들은 지난해 팀이 창단 후 가장 좋지 않은 시기에 진정성 있는 눈물을 흘렸던 최은성을 오히려 내몰았습니다.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저 위기 한 번 넘겼다 해서 '리빌딩'이라는 명목으로 이런 식으로 대처했다간 더 큰 코를 다칠 수 있음을 대전 구단은 잘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일을 통해 베테랑 선수에 대한 대우에 대해 축구계가 좀 더 생각해보는 계기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K리그에 딱 머릿 속에 떠오르는 레전드 스타, 프랜차이즈 스타가 많지 않은 것이 정말로 불행한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 '대전 구단'이라고 표현한 것은 '구단 수뇌부'를 의미하기 위한 것입니다. '대전 시티즌'은 구단 수뇌부와 선수 구성원 전체를 뜻하기에 이보다 좀 더 압축된 단어를 사용했음을 밝힙니다.

대학생 스포츠 블로거입니다. 블로그 http://blog.daum.net/hallo-jihan 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스포츠를 너무 좋아하고, 글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