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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랏빛 맥문동 이야기[종이에 그린 들꽃 향기] 맥문동
조현옥 수필가 | 승인 2022.01.03 11:10

[미디어스=조현옥] 동지가 지났는데도 맥문동 열매가 까맣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등교하는 아이들을 맞이하고 있다. 긴 여름 무성한 초록 잎 사이에 연보라색 촛대처럼 피어있던 작은 꽃들은 이 열매를 남기고 시간 속으로 떠났다. 흑진주같이 알알이 맺힌 열매는 지나간 꽃의 이야기를 담고 익어왔기에 더 반짝이는 듯하다.

대학에 원서를 내고 처음으로 친구들과 서울에 있는 대형 백화점을 구경하며 마냥 신기하고 행복했던 시절이 있다. 입학하고 나서 알게 된 현실은 우리가 또 하나의 거대한 장막으로 덮인 세상만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여름 하늘을 이고 선 작은 맥문동 꽃송이처럼 한 명 한 명의 작았던 우리들은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그 화려한 백화점을 둘러싼 거리를 뛰어다녔다.

학교까지 가는 데만 거의 두 시간, 막차를 타고 수원에 올 때까지 동동거리며 불규칙한 식사와 빼곡한 시간표를 달리던 나는 탈이 나고 말았다. 병원이나 한의원에서도 뾰족한 치료 방법이 없는 극심한 알레르기에 시달리며 허약해진 상태에서 나는 스스로 한방 치료법이라는 책을 보며 내 몸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찾았다. 그때 들었던 이름 중의 하나가 맥문동이었다.

맥문동 (사진=조현옥)

맥문동은 작은 꽃송이와는 어울리지 않게 백합목의 식물이다. 뿌리를 볶아서 먹거나 달여 먹으면 내장의 열을 내리고 몸의 진액이 마르는 허약체질에 약효가 있다고 한다. 기관지나 폐질환에도 좋고, 차로 마시면 미세먼지 제거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조선의 장수 왕이었던 영조의 건강을 지켜주던 식품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맥문동 꽃말은 ‘겸손’과 ‘기쁨의 연속’이라고 하니 전염병이 3년째 이어지는 이때, 참 반가운 꽃이라는 생각이 든다. 꽃대에 맺힌 꽃송이 하나가 피어날 때마다 기쁜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눈이 하얗게 내린 날에도 맥문동 잎은 여름보다 누워있기는 하나 초록 잎의 싱싱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맥문동을 인동초(忍冬草)라고도 하고 불로초(不老草)라고도 한단다. 진시황이 그렇게 찾았던 불로초가 알고 보면 주변에 흔했던 인동초가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도로변이나 공원을 걷다가 낮은 곳에 피어있는 맥문동을 보려고 가만히 고개를 숙여 그 꽃을 바라보며 겸손함을 배운다. 잎이 부추를 닮아 구(韭)라고도 한다지만 맥문동 잎은 힘이 있어 난초의 지조를 닮은 듯하다. 마르고 체격이 작지만 야무지게 자기 일을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했던 누군가를 떠오르게도 한다. 

맥문동 (사진=조현옥)

연보라색 꽃잎 안에는 관심 있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노란 꽃술이 숨어 있다. 귀 기울이는 사람에게만 들려주는 노란 속삭임이다. 

지난여름 이 학교를 처음 방문했을 때 교문 앞 화단에서 싱그러운 맥문동 꽃송이를 만났다. 작은 화단이지만 맥문동은 하나의 꽃대에 수십 송이의 작은 꽃이 피니 그때 만난 꽃송이가 백만 송이쯤 되지 않았을까. 내가 새로 만난 학생들은 가르치는 학생만 350여 명, 전체 학생은 천 명 정도이다. 천여 명의 인생을 만나고 천여 명의 미소를 보고, 천여 명의 인생을 느끼고 감동한다니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내가 말하고 전하는 한 가지가 그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한다. 때로는 그들의 아픔과 상처가 나에게 다가오기도 하고 조심하더라도 나의 나쁜 영향이 그들에게 갈 때도 있었으리라. 그들과 내가 만든 시간은 무슨 색 꽃이고 무슨 색 열매가 되었을까. 어쩌면 붉게 맺힌 산수유 열매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며칠 전 퇴근 무렵에 반가운 문자가 왔다. 여러 해 전 가르쳤던 학생이다. 전교생이 잊지 못할 사연을 갖고 졸업식 하던 날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보냈던 아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한 번 만났는데 밥을 먹고 찻집에서 슬그머니 나가더니 목도리를 하나 사 와서 건넸다. 만나자마자 선생님 갖고 싶은 것 다 사드릴게요, 뭐 갖고 싶냐고 해서 됐다고 했더니 목도리를 사 온 것이다. 

예전 같지 않고 선생님과 부모님 걱정 안 끼치고 잘하고 있다는 말만 들어도 반가웠는데, 그 뒤 내신 2등급을 받았다고 전화를 했다. 1등급 받으면 연락한다더니 그새 몇 년이 지나갔다. 지금은 해군이 되어 정착했다고 하는데 목소리가 밝고 따뜻했다.

처음 그 애를 만났을 때는 서로가 잘 몰랐기에 서로 상처를 주는 시간도 있었다. 휴일에도 방학에도 전화를 하는 내가 너무 싫다고 간섭하지 말라고 했지만 난 걱정이 되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춘기의 열병이 아이를 태워버릴 것 같은 때에 아버지에게 가능하다면 그 아이와 여행을 가셨으면 좋겠다고 권유했다. 그 애와 아버지는 두어 번 여행을 다녀왔다. 그 이전의 과정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아이를 잡아 준 것은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이다.

맥문동 열매 (사진=조현옥)

봄부터 준비하여 여름의 에너지를 충분히 받은 맥문동은 흑진주 같은 열매를 만들고, 또 겨울을 견디어 낸다. 사계절이 어찌 마디마디 따로 끊어지고 우리 삶에서 고통과 슬픔, 인내와 행복이 따로이겠는가. 올해 만난 맥문동꽃은 올해의 이야기를 담고 사라지지만 그 사연이 양분이 되어 내년에 또 피어오를 것이다. 

전에 함께 근무했던 동료가 자신의 고향인 함안에 맥문동꽃이 핀 풍경이 진경이니 꼭 한번 가보라고 한 적이 있다. 2022년 여름은 맥문동 꽃송이에 또 다른 이야기를 담으러 그곳에 한번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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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옥 수필가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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