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조현옥] 하루하루 낮아지는 기온이 저수지 풍경을 무채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여름 내내 연잎과 초록을 견주던 갈잎이 희뿌옇게 변하여도 갈대는 변함없이 제자리에서 그곳을 찾는 사람과 새들에게 눈인사를 한다. 나이 들며 흰머리, 눈가 주름이 같이 늘어가는 친구를 보면 정겹듯이, 한 해의 끝에선 누르스름한 갈잎이 푸른 잎보다 마음에 위로가 되는 것 같다.

초록색 줄기와 잎이 변하며 하얀 깃털이 나부끼는 갈대를 보니 퇴색이 아닌 성숙과 너그러움으로 여겨진다. 싱그럽고 푸른 젊음이 떠나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는 날이 길어질수록 나의 목소리와 주장으로 가득했던 마음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와 마음을 담아둘 공간도 늘어나기에 이전보다 편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 저수지의 갈대도 계절을 지나는 바람을 맞으며 줄기를 비워왔기에 꺾이지 않고 지금도 그를 찾아오는 새들의 친구가 되고 있다. 그래서일까, 갈대의 꽃말은 신의, 믿음이라고 한다. 이제 눈이 내리고 저수지가 하얗게 덮이면 갈대는 그 고요한 풍경을 바라보며 그곳을 찾는 철새들에게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 줄 것이다.

푸른 갈대와 왜가리 (사진=조현옥)

올해 초여름이었던 것 같다. 주변 몇 개 동 사람들의 산책로인 저수지 둘레길 한쪽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있었다. 다가가 보니 너구리 한 마리가 갈대를 베어낸 습지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공원에 ‘너구리 출몰 주의’라는 푯말이 있기는 했어도 이 근처에서 진짜 너구리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생각해보니 저수지 둘레에 갈대가 우거져 숨어있기 좋고, 물가로 접근하기도 좋아 물에 사는 잉어와 그곳에 내려앉은 새들을 잡아먹기에 용이했을 것이다. 너구리가 숨어 살며 먹잇감에 접근하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10여 년을 그곳에 산책하러 다녔지만 나도 너구리를 보지 못했고, 너구리를 보았다는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 환경에 갈대의 역할이 컸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올해는 여느 해보다 한 달이나 일찍 봄꽃이 핀 덕에 저수지로 가지를 늘어뜨린 벚꽃이 겨울을 지나고 서 있던 갈대와 맞닿은 것을 보았다. 따뜻하고 화사한 봄을 상징하는 벚꽃과 은은한 갈대가 있는 풍경은 저수지에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 놓은 듯했다. 계절의 구분이 있지만, 자연은 그 언저리에서 선을 긋지 않고 서로를 받아들이고 함께 어울린다.

때로는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는 갈대를 변덕스럽고 지조 없는 존재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나는 갈대의 마음은 수용이라고 생각한다.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에서처럼 갈대는 강변 근처에서 바람에 몸을 맡기고 흔들리며 그 풍경을 바라보는 누구라도 받아들이며 그를 맞는다.

갈대 (사진=조현옥)

그리스 신화에 재미있는 갈대 이야기가 나온다. 목축의 신인 판이 시링크스를 좋아하였는데 그녀가 쫓기다가 물가에서 갈대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갈대로 변한 시링크스를 그리워하며 판이 갈대 줄기를 불어 갈대피리가 생겨났다고 한다. 갈대의 노래, 갈대의 울음이라는 말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슬픈 사랑 이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곧게 자란 줄기와 하얀 털이 나부끼는 갈대와 억새는 가을풍경의 주인공으로 종종 혼동되기도 한다. 물억새를 제외하고는 억새는 건조하고 가파른 곳에 자라며, 갈대는 습지나 하천같이 수분이 많은 곳에 사니 갈대는 물의 친구요, 억새는 높은 성벽이나 산의 친구라고 할 수 있다.

둘 다 볏과의 식물로 잎맥이 나란하지만 억새의 잎 가장자리는 까칠한 부분이 있다. 억새는 다 피면 꽃과 털이 좀 더 뽀얗고 은빛이 나며 털이 가지런하다. 갈대는 조금 더 누런빛으로 이삭이 동그랗게 매달려있으며 털도 부스스해 보인다. 갈대의 털 역시 씨앗을 멀리 보내기 위한 역할을 한다.

갈잎의 어린 순은 데쳐 먹기도 하고 성장한 줄기와 잎은 노(蘆)라고 불리며 울타리나 발을 엮는 데 쓰였다. 펄프의 재료가 되기도 한단다. 이삭은 빗자루를 만드는 데 쓰였다니 갈대는 친근하면서도 삶의 근간이 되는 재료들이다.

어찌 보면 억새는 외모와 머리를 단정하게 다듬은 세련된 모습이고 갈대는 열심히 일하다 나와 아직 자신의 매무새를 다듬지 못한 수수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높은 성벽 아래서 저녁 빛을 받고 단정한 은빛 털을 나부끼는 억새가 주는 아름다움은 장관이라 할 수 있다. 반면, 강변으로 고개를 숙이고 왜가리가 나는 것을 바라보는 갈대에게서는 건강하게 잘 자란 자녀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따뜻함이 느껴진다.

갈대 (사진=조현옥)

몇 년 전 취업 시험을 치르고 난 딸과 순천만 갈대 습지에 다녀왔다. 애써 노력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안고 있던 딸아이에겐 위로가 필요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곳을 걸었다. 하늘과 갈대가 맞닿은 갈대 지평선이 우리의 시선을 통해 마음에 와닿았다. 그것을 바라보며 걷는 시간은 우리에게 위로가 되었다. 넓고 넓은 습지에 11월의 바람이 불자 갈대가 ‘괜찮아’하고 노래를 부르는 듯했다.

그럴 때가 있다. 삶이 녹록지 않아 영혼의 힘을 다하여 애써야 할 때가 있다. 노력한 결과를 기다려야 할 때도 있고, 좋지 않은 결과를 털어내야 할 때도 있다. 소리 없이 마음을 적시는 봄비도 맞고, 위엄을 떨치듯 요동하는 천둥 번개와 소나기 속에서 마음을 비워온 갈대는 그의 줄기 속에 누군가의 아픔을 품고 말 없는 위로를 줄 줄 안다.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우리 생활 가까이 있는 연못이나 개천가, 저수지에 피어있는 갈대는 마음 치료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수지 둘레의 갈대를 바라보며 이 가벼운 존재에게 깊은 감사를 하게 된다. 갈대 울타리가 아니라면 저수지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 때문에 연못의 생태계는 소란하고 불안함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갈대를 바라보며 걷는 사람에게도 갈대가 있는 풍경은 마음의 평화를 준다. 갈대를 바라보며 나는 오늘 누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누구에게 위로를 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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