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내년에는 수신료를 현실화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수신료가 현실화되고 재원이 안정되면 광고비중도 점차 줄여나가 진짜 제대로 된 공영방송을 만들어나갈 생각입니다."(2009년 11월 24일 취임사에서)

"(야권, 시민사회가 '불공정보도'를 이유로 수신료 인상을 반대하는 것에 대해) 현재 (방송3사 가운데) KBS 뉴스의 시청률이 가장 높습니다. 신뢰도가 떨어지는데 시청자들이 많이 보겠습니까?"(2010년 11월 22일 KBS가 개최한 수신료 인상 기자회견에서)

"올해 제일 중요한 첫 번째 과제는 2월에 수신료 인상을 관철시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신료 인상의) 가능성을 묻는데, 저는 '가능성 90%'라고 말합니다."(2011년 1월 3일 시무식에서)

"만약 KBS가 과거처럼 '편파보도'를 이유로 국민들로부터 지탄받았다면 (수신료 인상의 마지막 관문인) 이 단계까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2011년 4월 15일 국회 문방위 KBS 업무보고 자리에서)

"일부 야당의 반대로 수신료 인상안 처리가 늦어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신료 인상이 무산된 것은 아닙니다. 수신료 인상안은 국회 문방위 전체회의에 상정돼 있는 만큼 다음 국회가 열리면 곧바로 다시 처리에 들어갈 것입니다. 눈앞에 다가온 수신료 현실화를 위해 다시 한 번 우리의 모든 역량을 하나로 모읍시다."(2011년 7월 1일 KBS직원 월례조회에서)

"도청 의혹은 수신료 인상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공영방송의 미래가 달린 수신료 인상은 지속적으로 추진하겠습니다."(2011년 7월 27일 KBS이사회에 참석해)

"새해에는 수신료가 반드시 현실화 돼야 하고, 결국 그렇게 될 것입니다."(2012년 1월 2일 신년사)

김인규 KBS 사장이 2009년 11월 24일 취임한 이후, '수신료 인상'과 관련해 쏟아낸 발언들이다. "현재 KBS는 '공정보도'를 하고 있으며, '일부 야당'이 반대하고 있지만, KBS 직원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힘을 모으면, 조만간 수신료가 인상될 것"이라는 한 문장으로 수신료 인상과 관련한 김인규 사장의 생각을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 2010년 11월 22일 열린 '수신료 인상 기자회견'에서 김인규 사장은 직접 프레젠테이션까지 진행하며 '무료지상파 디지털TV 플랫폼 구축'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사진출처:KBS)

그러나, 김인규 사장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수신료 인상안은 18대 국회에서 '자동 폐기'될 전망이다. 17일은 임시국회의 마지막 날. 총선을 코 앞에 두고 3월 임시국회가 열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2월 17일은 김인규 사장의 막무가내식 수신료 인상 추진이 결국 처참한 실패로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역사적인(?) 날인 셈이다. 지난 몇 년간 KBS를 두고 쏟아진 시민사회의 거센 비판에 '아웃 오브 안중' 모드로 일관하며 수신료 인상 통과에만 혈안이었던 김 사장을 비롯한 KBS 경영진들로서는 뼈아픈 치욕의 날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자동폐기'라는 결과만 놓고 보자면, 4000원 인상안을 추진했던 2007년 당시 상황과 같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다. 김 사장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수신료 드라이브는 KBS 기자가 야당의 비공개 회의를 '불법도청'했다는 의혹까지 받는 등 사상 최악의 오점을 KBS 역사에 선명히 남겼기 때문이다. 수신료 인상 추진 과정에서, KBS 기자들이 '취재' 대신 '여야 정당 압박'에 나서고, 수신료에 비협조적인 민주통합당의 당대표 경선 중계방송을 거부한 행태 역시 '부끄러운 KBS의 역사'로 기록됐다. 이번의 실패를 단순히 '17대 국회에 이어 18대 국회에서도 자동폐기'라고 볼 수만은 없는 까닭이다.

과정의 민주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저돌적 드라이브로 이 같은 일들은 앞으로도 두고두고 KBS의 발목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수신료 인상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오히려 실패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고, 앞으로 오랫동안 작용하게 됐으니, 도끼로 제 발등을 단단히 찍은 모양새다.

김 사장이 2009년 취임사에서 약속했던 것 가운데, 지켜지지 않은 것은 수신료 인상 뿐만이 아니다. '무료지상파 디지털TV 플랫폼 구축' '세계적인 콘텐츠 개발' 등 어느 것 하나 뚜렷한 성과를 낸 게 없다. 취임 당시 일각에서 제기됐던 '김인규 유능론'이 무색해진 지 오래다.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으로부터 KBS를 지키러 왔다"는 대목 역시 현재의 KBS 상황에 비춰보면 실소만 나올 뿐이다. "제가 대선 캠프에 있었다고 해서 현 정부가 원하는 대로 정부 입맛에 맞게 방송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사람으로 보이느냐?"고 펄펄 뛰던 김 사장. 임기 내내 뚜렷한 실적 하나 올린 것 없는 김 사장이 '확실하게' 한 일이 있으니 바로 시민들의 뇌리에 'KBS는 권력의 나팔수'라는 각인을 시켜준 것이다. 김 사장의 임기 2년여 간, 불거진 불공정 보도 논란은 일일이 세기 힘들 정도다.

MB측근비리 침묵, G20홍보 특집프로 3300분 편성, 추적60분 4대강편 불방, 친일파 백선엽 미화 다큐, 독재자 이승만 찬양 다큐, 김미화ㆍ김제동 등 블랙리스트 논란, 박재완 논문 이중게재 9시 뉴스 누락, 메인뉴스를 통한 수신료 인상 홍보….

당장 KBS에서는 총파업이 일어날 조짐이다. 김 사장을 비롯한 KBS 경영진의 '염원'과 달리 미디어렙법만이 홀로 국회에서 통과된 다음날인 10일,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본부장 김현석)는 성명을 내어 "이제 김인규는 사장 취임 이후 수신료 인상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며 회사를 망가뜨린 책임을 져나가야 할 것"이라며 "수신료 인상 실패와 KBS를 총체적으로 망가뜨린 책임을 묻는 투쟁에 돌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15일 노보에서 김 사장의 3대 업적(?)으로 △공정방송 개박살 △막장인사 △수신료 실패 등을 꼽았던 KBS본부는 현재 김인규 사장의 퇴진을 위한 총파업 돌입을 코 앞에 두고 있다. 정연주 KBS 사장 해임무효 소송의 최종 결과도 조만간 내려지는 등, 김 사장의 남은 임기 9개월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수신료 인상이 최종 실패했음에도 유독 조용한 곳이 있으니 지난해 6월 24일, 민주당이 수신료 인상에 협조하지 않자 영등포 민주당사 앞까지 찾아가 '규탄 기자회견'을 개최했던 KBS노동조합(위원장 최재훈)이 바로 그곳이다.

10일 성명을 내어 "시민사회를 설득하려는 그간의 노력에 김인규 사장과 경영진이 어떻게 대응했고, 그것이 과연 정당하고 온당했는가에 대해 하나 하나 따지고 들자면 입만 아프다"고 말한 이후,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오지 말아야 할 자리에 와서 떠나지 않는 자, 나서야 할 때 나서지 않는 이들. 둘의 차이는 크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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