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 역사에서 지금껏 가장 치열한 엔트리 경쟁을 펼쳤던 때를 꼽는다면 아마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벌였던 이운재와 김병지 간의 골키퍼 경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본선 직전까지도 누가 주전 자리를 잡을지 몰랐을 정도로 이들 사이의 경쟁은 무척 치열했고, 이에 대한 관심 역시 뜨거웠습니다. 결국 이운재가 본선 7경기를 모두 뛴 주인공이 됐지만 둘 사이에 벌어진 경쟁은 결과적으로 경쟁력, 경기력 향상에 좋은 영향을 미치며 '선의의 경쟁'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준 사례로 꼽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 골키퍼 포지션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던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운재가 '패권'을 쥔 이후, 대표팀 부동의 수문장은 계속 이운재였습니다. 2007년 아시안컵 당시 음주 파동으로 자격 정지를 당했을 때만 잠시 김용대, 김영광, 정성룡 간의 경쟁이 펼쳐졌지만 복권된 이후에도 한동안 대표팀 수문장은 이운재였습니다. 골키퍼 포지션 경쟁론이 대두되고, 때마침 이운재의 기량이 저하되면서 남아공월드컵 본선에 정성룡으로 '세대 교체'가 이뤄지기는 했지만 조광래 감독이 대표팀을 맡은 뒤에는 계속 정성룡이 골문을 지켰습니다. 한마디로 한 번 문지기를 서면, 주전 자리를 보장받다시피 했습니다.

그랬던 골키퍼 포지션에 경쟁이 도입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새로 축구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최강희 감독이 골키퍼로 김영광에 높은 점수를 주면서 기존 '정성룡 1인 체제'에 변동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최 감독은 둘 다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지난해 같은 경우, 김영광의 점수가 미세하게 높았다면서 김영광의 주전 가능성을 내비쳤습니다. 최근 대표팀 경력으로는 정성룡이 단연 앞서지만 경험이나 기량적인 측면에서 결코 밀리지 않는 김영광과 경쟁 체제를 만들어 두 선수의 경쟁력, 경기력 향상을 이끌겠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특징 있는 두 수문장, 하지만 '큰 경기 부진' 아쉬웠던 정성룡

▲ 정성룡(왼쪽), 김영광(오른쪽) ⓒ연합뉴스
경험, 기본적인 기량 면에서 두 선수는 K리그, 한국 축구 탑(Top)입니다. 그러나 스타일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순발력이 있고 감각적인 김영광이라면 정성룡은 안정적이고 제공권 볼키핑이 좋은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큰 경기에서 안정감이 요구되는 만큼 기존 대표팀 코칭스태프에서는 김영광보다 정성룡에게 더 높은 점수를 부여하고 꾸준하게 주전 선수로 기용하고 있지만 김영광도 충분히 기회를 줄 후보로 거론돼 왔습니다. 그 정도로 저마다 장점이 있고, 특징 있는 수문장들이었습니다.

최강희 감독의 말처럼 지난해 두 선수의 활약은 비슷했습니다. 정성룡은 대표팀에서 꾸준하게 선발 출장했고, 소속팀에서도 팀의 상위권 진입을 이끌어내며 또 한 번 거듭난 한 해를 보냈습니다. 김영광은 꾸준하게 상승세를 타더니 팀의 준우승을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하며 K리그 최고 골키퍼로 거듭났습니다. 하지만 정성룡의 경우, 결정적인 큰 경기마다 불안전한 모습을 보이는 단점을 나타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최강희 감독이 김영광에 높은 점수를 줬고, '부동의 1인자' 정성룡은 위기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김영광에게 기회, 정성룡에게 분발 촉구 의미

최강희 감독이 공개적으로 김영광을 높이 평가한 것은 두 가지 배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그동안 대표팀 주전으로 뛰지 못했던 김영광에게 자신이 부임한 기간에는 충분히 빛을 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사실 김영광은 2002 한일월드컵 이후 차세대 주전 골키퍼로 꾸준하게 거론됐던 선수였습니다. 그러나 이운재, 정성룡의 빛에 가려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부임 기간 동안에는 오직 실력으로 주전 자리를 뽑겠다는 것을 천명했고, 그 가운데서 김영광도 충분히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최강희 감독의 뜻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더불어 정성룡의 '진짜 분발'을 촉구하는 의미로도 볼 수 있습니다. 지난해 대표팀 부진의 중심에 정성룡의 책임이 컸던 것도 부인할 수는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일본전, 레바논전 완패 뿐 아니라 전체적인 경기력 면에서 불안정한 부분이 많이 노출돼 대표팀 주전 골키퍼에 의문 부호가 달렸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정성룡이 주전 자리를 다른 선수에게 내줄 수도 있음을 공개적으로 밝혀 분발하게 만드는 효과를 노린 것으로 풀이해볼 수도 있습니다.

김영광이 잘 해야 하는 이유

이 경쟁 체제 추진의 키포인트는 바로 최강희 감독이 거론한 김영광입니다. 1인자로 오를 충분한 실력을 갖췄음에도 김영광은 이운재, 김용대, 정성룡 등에 막혀 더 떠오르지 못했습니다. 단점을 커버할 수 있는 확실한 장점, 특징을 꾸준하게 보여주지 못한 탓이 아무래도 컸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K리그 챔피언십을 통해 김영광은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였습니다. 소속팀에서도 챔피언십에서 '떠오르는 후배' 김승규의 승부차기, 패널티킥 활약 덕에 자극을 받은 영향이 컸는지 김영광은 장점인 순발력 뿐 아니라 안정감, 슈퍼 세이브 선방 능력에서도 꾸준하게 좋은 모습을 보이며 팀의 챔피언결정전 진출을 이끌어냈습니다.

분명한 상승세를 타고 있는 가운데서 김영광이 대표팀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면 개인적인 한도 풀고, 어쩌면 최강희호 체제에서 정성룡보다 앞선 위치에 오를 수도 있습니다. 설령 그것이 실현되지 못한다 해도 정성룡과의 꾸준한 경쟁 체제를 통해 튼실한 문지기로서의 경기력 향상을 얻는 데도 나쁘지 않은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2인자의 분발이 1인자를 자극시켜 2002년 월드컵팀 못지않은 수준을 이끌어낼 것이라는 얘깁니다. 이것이 바로 김영광이 잘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적당한 긴장감과 경쟁이 선수들의 투쟁심을 촉진시키고 동기 부여가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10년 가까이 한국 축구 골키퍼 포지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직 소집 훈련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어떤 포지션보다 앞으로 골키퍼의 경쟁 체제 도입은 크게 기대되는 측면이 많습니다. 이 같은 경쟁이 결코 두 선수에게, 또 축구대표팀 전체에게 마이너스가 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학생 스포츠 블로거입니다. 블로그 http://blog.daum.net/hallo-jihan 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스포츠를 너무 좋아하고, 글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