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칼럼] ‘오미크론’이라는 이름의 코로나19 변이 바이러스가 전 세계 경제를 들었다 놨다 한다. WHO가 ‘우려변이’로 지정하자마자 전 세계 증시와 유가가 폭락한 걸 보면 그렇다.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코로나19로 풀린 유동성을 거둬들이는 긴축으로 선회하는 국면에서 오미크론 변이의 출현은 최악의 경우 전 세계 경제를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예상 외’인가? 아니다. 오히려 올 것이 왔다는 것에 가깝다. 전문가들은 이미 지난해부터 전 세계가 코로나19에 공동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백신 접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일부 지역에서 치명적 변이 바이러스가 등장해 이전까지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 우려가 있다는 지적을 해왔다.

물론 오미크론 변이에 그 정도의 재앙적 가능성이 잠재돼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델타 변이보다 확산력이 크고 백신 항체를 회피할 가능성도 있다는 게 지금까지 알려진 것의 전부다. 우리가 대응 과정에서 델타 변이의 경우와 비교해 치명률 중증화율을 낮추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 전화위복의 기회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오미크론 변이는 바로 그 ‘최악의 상황’이 실제로 올 가능성을 우리에게 경고 혹은 예고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백신 공조나 치료제 개발이 제 속도를 내지 못하면 또다른 변이는 언제든 출현할 수 있다. ‘단계적 일상 회복’은 이런 상황까지 아울러 코로나19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기 위한 시도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단지 삶의 조건 일부를 변화하는 것만으로 이게 가능하다고 믿는 것 같다. 하지만 전 세계적 차원의 팬데믹은 기후변화와 더불어 우리의 삶이 근본적으로 ‘전환’돼야 한다는 당위를 가리키는 중요한 이정표이다. 언론이 습관적으로 쓰는 ‘위드코로나’, 즉 코로나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삶으로 가는 방법, 즉 ‘전환’이란 무엇인가?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많은 백가쟁명할 수밖에 없는 주제이다. 그러나 국민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중요한 역할을 자임하는 대통령 선거 후보들에게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자는 포부나 그에 걸맞은 기획은 찾아보기 어렵다. 어떻게든 표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우리 편’을 모아 선거라는 게임에서 이기겠다는 생각만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정권교체’에 앞장서겠다는 윤석열 후보의 메시지는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뿐이다.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 영입 실패는 이를 상징하는 하나의 요인이다. 당연하게도 김종인 전 위원장은 만능이 아니다.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로 볼 수도 없다. 그나마 지금 국민의힘을 보다 중도적 방향으로 일정 부분 변화시킬 수 있는 카드가 될 뿐이다. 그런데 그조차도 자기들끼리 자리 싸움 하느라 가장 도움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소모해버렸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가 28일 광주시 서구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광주 대전환 선대위 출범식에서 공동선대위원장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명 후보는 여러 변화를 얘기하지만 그것들로 문재인 정권보다 나은, 새로운 시대 흐름에 더 잘 맞는 어떤 대안이 되겠다는 것인지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문재인 정권이 했던 일들을 단지 불안정한 방식으로 재현하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할 정도이다. 빠른 법안 처리를 위한 ‘패스트트랙’을 언급한 것과 ‘역사왜곡 단죄법’을 만들겠다고 주장한 것 등이 그렇다. 이러한 소재들은 여야의 정치적 대립구도를 강화해 ‘지지층 결집’을 유도하는 카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다수 유권자들이 이재명 후보에 원하는 것은 자기 정파 동원 논리를 강화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외면당해 온 실질적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슈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리더십의 소유자라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가령, 오미크론 변이의 시대는 경제 위축을 필연적으로 동반할 것이다. 전문가들은 꼭 오미크론 변이 때문이 아니더라도 중증환자 병상 부족 등을 이유로 거리두기의 강화가 다시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부는 코로나19로 인한 손해를 산정하기 어려운 자영업자 지원에 소극적이고, 병상확보도 민간병원을 상대해야 하는 대목에선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 필연적 결론은 코로나19가 가져온 세상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는 ‘혁신’의 필요성을 말하면서, 모든 부담을 약자들이 나눠지는 각자도생의 시스템으로 ‘혁신’을 떠받치는 구조가 고착화되는 것이다. 오직 책임을 서로 떠넘기기만 할 뿐인 이런 방식으로 시대적 과제를 감당하는 게 가능할까?

양당의, 서로를 반대하면서 스스로의 정당성을 쌓아 가기만 할 뿐인 구태한 정치 전략에 대항하는 의미로서 ‘제3지대 연대’는 이런 해법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제3지대’의 의미가 ‘1, 2지대에 대한 반대’에 그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한계를 노출할 수 있다. ‘제3지대’는 ‘1, 2지대’라는 또다른 ‘제1지대’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제2지대’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제3지대’가 또다른 ‘2지대’의 자리를 자임해서는 오히려 양당체제의 부속품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제3지대’를 자임해 온 세력들은 대개 이런 함정을 피해가지 못했다. 따라서 ‘제3지대’를 자임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이 시대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안철수 심상정 김동연 세 후보가 단일한 실천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3지대’가 보여줘야 할 것은, 단일한 행동강령에 합의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각자 고유한 주장을 유지한 상태에서 정치적 합의와 연대를 얼마나, 어느 수준까지,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제3지대’는 단지 모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실내용도 1, 2지대와는 달라야 한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지금까지 ‘제3지대’의 세 후보는 이 가능성을 쥐꼬리만큼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렇다는 점에서 ‘제3지대’의 시도는 각자의 파이를 키운 상태를 밑천으로 삼아 제각기 알아서 기성 정치에 다시 투항하는 것 아니냐는 평가를 피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물론 이것은 단지 오늘까지의 평가일 뿐이다. 어느 지대에 있든, 각자 시대의 짐을 짊어진다는 책임감으로 경쟁에 임해야 가능성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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