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나는 신에게 나를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 뉴욕 신체장애인 회관에 새겨진 작자 미상의 시 중에서

육체적 능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인간'은 늘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 떤다. 포악한 동물들에게 언제 잡아먹힐지 모르며 폭우, 가뭄, 천둥, 번개, 벼락 등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변화무쌍한 천재지변에 역부족인 존재가 고통스럽다. 문명이 발달한 지금은 다를까? 여전히 인간은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왜소하다.

그런데 인간은 상대적으로 '지적 능력'이 뛰어난 존재다. 자신이 살아가는 이 '불가지론'의 세계에 대해 설명하고 해석하고 싶다. 그리고 불안감을 달래줄 장치가 있었으면 싶다.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바로 거기서 '종교'가 등장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내가 설명할 수 없는 세상, 그 세상을 기획하고 주재하는 그 누군가의 존재만으로 얼마나 미더운가 말이다. 하지만 그 '자의적 해석(?)' 시도가 때로는 인간을 옥죈다. 평안을 얻고자 했는데 외려 그 평안이 우리의 목을 조른다.

연상호 월드의 시작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 (사진제공=넷플릭스)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카페에서 한 사람이 초조함에 어쩔 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쿵쿵 소리와 함께 나타난 집채만 한 괴물들, 그걸 본 남자는 예견이라도 했다는 듯 도망치지만 역부족이다. 폭주하는 괴물들에게 잡히고 만다. 결국 불에 탄 잔해가 되어버린 남자.

이 장면을 보고 가장 먼저 든 궁금증은 무엇일까? 당연히 저 괴물들이 누구일까가 아닐까? 많은 블록버스터급 영화들은 괴물의 개연성에 공을 들인다. 하지만, 연상호 월드에서는 아니다.

세간에 그의 이름을 알린 <부산행>을 비롯하여 <서울역>, <방법: 재차의> 등에서 좀비라든가, 되살아난 시체던가는 느닷없이 등장하여 일상의 삶을 균열로 이끈다. <지옥>도 다르지 않다. 느닷없이 나타난 괴물들이 도심을 폭주하며 한 인간을 잡아 처참하게 죽이고 사라진 이 기현상을 선포하며 시리즈는 시작된다.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 (사진제공=넷플릭스)

거기서 연상호 감독이 주목하는 건 우리의 인식적 능력을 넘어선 현상에 대한 인간들의 '대응'이다. 이런 감독의 세계관은 <사이비>에서 마을에 새로 생긴 교회를 둘러싼 인간 군상의 쟁투에 닿아있다. '종교'라는 믿음을 전제로 한 권력의 등장과, 그 권력을 둘러싼 인간들 저마다의 선택이 바로 우리 사회의 민낯이라 연상호 감독은 말했었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현상을 보고 두려움에 떤다. 그런데 이미 '답'이 있단다. 온라인 동영상을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한 신흥 종교 '새진리회' 의장인 정진수(유아인 분)는 '신의 계시'라고 설명한다. 천사라고 하는 괴현상이 사람에게 나타나 죽을 날을 '고지'하고, 그날이 되면 어김없이 사자들이 찾아와 지옥으로 데려간다고 한다.

대낮에 누군가가 처참하게 죽어가는 상황을 목격한 사람들에게 그 설명이 먹혀든다. 경찰은 수사를 하지만 그 끝에 만난 건 지구상의 과학으로 해명할 수 없는 물질이다. 해명할 수 없는, 결국 '신의 심판'과 '지옥'이라는 화두 말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이 현상에 대해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선택을 한다.

정진수가 이끄는 새진리회는 신의 심판이라는 종교적 해석을 신봉하고 적극적으로 이를 이용하는 집단이다. 심지어 매스미디어를 활용해 박정자의 심판 과정을 생중계하여 종교적 집단의식 고양의 계기로 삼고자 한다.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 (사진제공=넷플릭스)

의인이자 선지자적인 존재로 사람들에게 진리를 설파하는 듯한 종교의 창시자 정진수의 실종 이후 새진리회는 보다 조직적이며 광범위하게 군림하는 존재로 세상을 지배한다. 박정자의 죽음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은 이후 사람들은 신이 아닌 '새진리회'에 자신들을 맡긴다. 원시시대 자신들이 알 수 없는 벼락 앞에 신을 부르던 원시인들과, 신의 심판이라 해석된 한 여인의 잔혹한 죽음 앞에 무릎 꿇은 21세기 인간들의 무지몽매는 다르지 않다.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제일 그럴듯하게 해석하는 집단 새진리회에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권리'를 넘긴다.

모든 종교적 전통은 특정 사람들을 단결시키고 이웃을 구분한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하지만 새진리회가 세상을 지배하는 데는 마타도어 집단인 화살촉이 큰 역할을 한다. 새진리회가 정론을 선포하면 리더(김도윤 분)의 인터넷 방송을 기반으로 선전선동하고, 거기에 경찰서 습격도 마다하지 않는 폭력적 집단행동이 아이러니하게도 새진리회의 아성을 공고하게 만든다. 괴벨스 없는 히틀러가 가능하지 않듯이, 그들의 폭력적 린치를 통해 고지는 심판의 성격을 더욱 명확하게 만들어갔으며, 심판 받은 자들은 죄인이 되어갔다.

대세가 되어가는 새진리회, 종교적 해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선택을 한다. 형사 진경훈과 그의 딸 희정은 5년 전 아내와 엄마를 잃었다. 딸이 경훈에게 옷가지를 전해주러 간 사이 아내이자 엄마는 살인범에게 목숨을 잃었다. 심판의 시대, 희정은 그 심판의 과정에 자신의 묵은 원한을 얹어 편승한다. 철없는 아이의 홀릭이라 아버지는 걱정했지만 정작 희정은 새로운 메시아와 공범이 된다. 그리고 희정의 아버지 진경훈은 예수를 부인한 제자처럼 정진수의 죽음에서 드러난 진실에 입을 다문다.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 (사진제공=넷플릭스)

너무도 그럴듯해 보였던 '고지', 그리고 '심판'과도 같았던 괴물들의 등장과 린치와 잔혹한 화형. 정말 그대로 '지옥행' 같아 보인다. 정진수의 자조적이며 시니컬한 내레이션은 그런 '종교적 분위기'를 배가시킨다. 죽어간 사람들의 범죄 사실이 '처벌'의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21세기의 신은 그렇게 오는 걸까? 그러기에 화살촉이 선동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저 미혼모라는 박정자를 의심한다. 아마도 지켜본 시청자들 역시 괴물에 의해 죽어간 사람들이 희생자가 아니라, '지옥에 갈 마땅한 사람들'이라고 여기지 않았을까?

연상호 감독의 <지옥>은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가공할 해프닝을 배경으로 한 사회의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 지옥 속으로 빠져드는가를 보여준다.

하지만 종말론적 흐름은 새진리회를 창시한 정진수 본인이 왜 심판 받는지 모르겠다며 죽어가며 '역설'을 선사한다. 그리고 시리즈의 후반부, 약장수 같은 새진리회의 새 교주와 그럼에도 보다 체계화되어가는 종교의 횡포 아래서 고지를 받은 이들과 그들의 가족을 구원하려는 민혜진(김현주 분) 변호사 등의 활동이 구체화되며 종교적 '미망'은 흔들린다.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구한 믿음이 그저 '도그마'에 불과하며 새로운 '지옥'이 열리고 있음을 드라마는 보여준다.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 (사진제공=넷플릭스)

심판의 화형식에서도 생명을 구한 영재와 소현의 아이, 그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도피한 민혜진을 태운 택시기사는 말한다. 그저 자신은 '인간의 일'을 할 뿐이라고. 천사라며 고지를 내리고, 괴물들이 포악하게 한 생명을 거두어 간다 해도, 설사 그것이 진정 '신의 심판'이라 하더라도 결국 그 불가지한 현상 앞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건 '인간의 몫'이라고 드라마는 말을 맺는다.

신에게 의탁한다며 자신들의 권리를 '새진리회'에 내준 시민들은, 사기꾼과 협잡한 목사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자신들의 모든 걸 내맡긴 <사이비> 속 마을 사람들과 다를까. 인간이라는 종족의 경계를 넘어선 현상과 존재들을 내세워 종교적이거나 초월적인 문제를 다루는 듯하지만, 결국 그 과정을 통해 연상호 감독이 묻는 건 '인간'의 의지이다. 설사 신이 강림한다 해도, 이 세상은 '인간'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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