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샤이닝>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올해 11월. 토탈필름이 역대 최고의 공포 영화 TOP30을 발표했다. 쟁쟁한 작품들 사이에서 1위를 차지한 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샤이닝>. 토탈필름은 공포의 왕좌에 오른 ALL TIME BEST를 이렇게 소개했다.

“이것은 멍청한 놀래킴이나 싸구려 속임수로 만들어진 공포 영화가 아니다. 큐브릭의 영화는 TV가 어두워진 후에도 오랫동안 여러분 곁에 머물러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짐승이다(This is not a horror movie made of boo scares or cheap tricks, Kubrick’s film is a lurking, dangerous beast that stays with you long after your TV has gone dark.).”

할리우드 흥행 역사가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짐승의 산파 역할을 했다. 1970년대는 공포 영화의 시대였다. 1973년 <엑소시스트>가 엄청난 성공을 거둔 후 역사에 남을 공포 영화들이 쏟아져나왔다. 토탈필름에서도 상위 10편 중 무려 절반이 70년대 작품이다(<엑소시스트>,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 <할로윈>, <죠스>, <에일리언>). 1980년 개봉한 <샤이닝>은 공포 영화 흥행 막차에 올라탄 야심 찬 프로젝트였다.

전작 <배리 린든>이 아쉬운 흥행성적에 이를 간 큐브릭 감독은 ‘역사상 가장 무서운 공포 영화를 만들겠다’라는 포부를 밝혔다. 원작은 호러의 제왕 스티븐 킹의 작품. 스타와 작업을 기피하던 큐브릭 감독이지만 밀로스 포먼 감독의 <뻐꾸기둥지 위로 날아간 새>로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한 잭 니콜슨, 로버트 알트만의 <세 여자>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셜리 듀발의 캐스팅으로 흥행의 고삐도 바짝 죄었다. 영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콜로라도주에 있는 오버룩 호텔은 폭설로 고립되는 겨울에는 영업을 하지 않고 사람을 고용해 봄까지 관리를 맡긴다. 그런데 오버룩호텔의 전임 관리자는 아내와 쌍둥이 딸을 죽이고 자살을 했다. 소설가 지망생 잭 토랜스(잭 니콜슨)은 인터뷰 중에 이 얘기를 듣지만, 작품을 쓰기 위해 아내 웬디(셜리 듀발)과 대니(대니 로이드)를 데리고 호텔로 온다. 잭의 아들 대니는 ‘샤이닝’이라는 초능력이 있다. 말을 않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거나 사물이나 장소에 깃든 영혼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대니는 샤이닝을 통해 끔찍한 이미지들을 보게 된다.

영화 <샤이닝> 스틸이미지

야심 찬 포부와 달리 <샤이닝>의 흥행은 뜨뜻미지근했고 (제작비 약 1,900만 달러. 북미 흥행수익 약 4,400만 달러) 평단의 반응은 냉담했다. ‘영화가 느리다’, ‘원작을 못 살렸다’는 악평이 줄을 이었다. 스티븐 킹은 ‘아름다운 캐딜락에 모터가 없는 꼴’이라며 영화를 혹평하고 자신의 버전으로 드라마를 만들었다. 급기야 최악의 영화를 꼽는 골든 라즈베리 어워드가 열린 첫해에 큐브릭은 최악의 감독상 후보로 올랐다. 역사상 가장 무서운 공포 영화는커녕 가장 우스운 공포 영화가 될 뻔한 것이다.

그렇게 40년이 흐른 지금, 평단의 평가는 극적으로 변한다. 영화가 느린 게 아니라 최면적이라고,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수많은 영화 중에 단연 최고작이라고. 토탈필름과 함께 역대 최고의 공포 영화로 <샤이닝>을 선정한 엠파이어 지의 평가는 명작이 꼭 당대에 인정받지 않는다는 고백이자 반성이기도 하다.

“약간 뒤늦은 깨달음은 어떤 차이를 만드는가. 큐브릭의 많은 작품과 마찬가지로 시간은 친절했고, 이제 <샤이닝>이 비교할 수 없는 걸작이라는 것은 눈이 부시게 명백해 보인다: 정확하고, 꼼꼼하고, 초현실적이고, 시각적으로 놀라우며 광기로 하강하는 것에 대한 빛나는 연구다. 최고의 공포 영화다. (What a difference a bit of hindsight makes. As with a lot of Kubrick's work, time has been kind, and it now seems blindingly obvious that The Shining is a masterpiece without parallel: precise, meticulous, surreal, visually astonishing, a shimmering study of a descent into madness. The ultimate horror movie.)”

영화 <샤이닝> 스틸이미지

영상언어의 교과서로 풀어쓴 귀신 들린 집

위험한 짐승은 골격부터 탄탄하다. ‘영상 언어의 교과서’라고 불릴 만큼 치밀한 촬영, 음악, 편집을 통해 초능력과 사후세계가 난무하는 초현실적인 공간에 납득될 수밖에 없는 현실감을 부여한다. 트랙킹숏으로 대니의 자전거를 흔들림 없이 뒤쫓는 스테디 카메라는 마치 오버룩 호텔에 머무는 원혼의 시선처럼 보인다. <록키>에서 처음으로 사용됐지만, 영화의 주제와 밀착하며 스테디 카메라가 서사적 기능으로 100% 활용된 건 <샤이닝>을 최초로 본다.

영화는 평범한 구직 인터뷰로 시작하는 현실적인 시퀀스로 출발해 초능력자와 귀신이 출몰하는 초현실로 끝난다. 하지만 이질적일 수 있는 현실과 초현실의 접합을 지적하기는 힘들다. 로키산맥 어딘가에, 지금도 12월부터 5월까지 눈이 쌓이면 고립되고 마는 호텔이 존재하는 것 같은 완벽한 미장센에 서사까지 매끈하게 이어붙인 큐브릭의 연출력 덕이다. 달착륙 조작설의 총감독이 큐브릭이었다는 루머가 지금도 유효한 까닭도 같은 맥락이다.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컷 편집은 엄청난 특수효과 없이도 미쳐가는 잭과 오버룩 호텔의 초현실적인 에너지를 새긴다. 특히 호텔 로비에서 정원에 설치된 미로의 미니어처를 바라보는 잭, 미로에 갇힌 웬디와 대니를 조망하는 부감샷을 연이어 배치해 마치 잭이 웬디와 대니를 조종하는 것 같이 효과를 내는 장면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허공에 치솟은 뼈도끼가 우주선으로 변하는 시퀀스만큼 놀랍다.

<샤이닝>은 기존의 공포 영화와 차별화된 활동반경으로 공포가 일상에 침투할 수 있는 영역을 과감하게 넓혔다. ‘귀신 들린 집’이라는 전통적인 소재를 아이템으로 선택했지만, 어두컴컴한 복도와 지하실도 없고 갑자기 튀어나와 놀래키는 귀신도 없다. 압도적인 피바다는 보일망정 미치광이의 잔인하고 기괴한 취향을 전시하지도 않는다. 리게티, 펜터레츠키 같은 현대음악의 거장이 공들여 만든 불협화음은 호텔에 불안한 공기를 불어 넣고 시종일관 밝고 넓고 깔끔한 고급 호텔을 배경으로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타자기 소리, 공격적으로 벽에서 튕겨 나오는 테니스공 소리가 심리적으로 조여오는 우아한 공포를 완성한다.

영화 <샤이닝> 스틸이미지

튼튼한 뼈대를 기민하고 강력하게 만드는 건 다층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서사다. 지금도 <샤이닝>에 대한 해석은 연이어 나오고 있다. 미국의 역사에 대입한다면 인디언들의 무덤 위에 세워진 오버룩호텔의 기원부터 예사롭지 않다. 호텔 복도와 벽면은 인디언 전통 무늬로 채워져 있고 동시에 4명이나 방문했다는 미국 대통령 사진과 유명한 연예인들의 사진도 전시되어 있다. 가족의 의상도 지극히 미국적이다. 잭은 개척시대의 벌목꾼 같은 체크 셔츠와 청바지, 가죽점퍼를 주로 입는다.

점차 미쳐가는 잭은 골드볼룸(Gold bowl room)에서 바텐더 로이드를 만난다. 유령처럼 핏기없는 바텐더는 술을 끊은 잭에게 위스키를 따라준다. 위스키를 더블샷으로 마신 잭은 갑자기 시키지도 않은 백인의 책무를 강조한다. 이후 화장실에서 잭은 오버룩 호텔의 전임 관리자이자 아내와 딸들을 토막살인한 그레디를 만난다. 그레디는 Nigger라는 멸칭을 쓰며 흑인이 호텔로 침입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역시 샤이닝을 가진 할로렌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눈밭을 달릴 수 있는 스노우캣을 끌고 호텔로 오는 중이었다. 백인의 책무를 다하겠다던 잭은 결국 흑인의 가슴팍을 도끼로 내려찍는다.

가부장제의 폐해는 또 하나의 공포의 맥락이다. 아들인 대니를 학대한 적 있는 잭은 호텔 생활 한달 만에 웬디를 거칠게 몰아붙인다. 로비에서 자신의 인기척이 들리면 글을 쓰는 중이니 집중이 흐트러지지 않게 얼씬도 하지 말라며 욕설을 퍼붓는다. 로이드와의 대화에선 아내를 ‘정자은행’이라며 비하한다. 대니가 아파 호텔을 나가겠다는 웬디에게 자신의 책임감이 얼마나 막중한지 아냐며,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고생하는 자신이 보이지 않냐며 공격한다. 실제로 잡무를 처리하며 호텔을 관리하는 건 웬디지만 말이다. 가장으로서 구성원들의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으라(Correct)’는 그레디에 충고에 잭은 도끼를 든다.

영화 <샤이닝> 스틸이미지

무슨 일이 생기면 말이지, 그것의 흔적이 남을 수 있단다

당시 유명한 공포소설을 모두 읽었다는 큐브릭이 스티븐 킹의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인간성에는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부분을 포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서사는 큐브릭이 일관적으로 탐구해온 통제 불능과 텅 빈 내면이라는 주제와도 공명한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계태엽 오렌지>는 각각 통제 불능의 핵무기, 인공지능, 인간성을 통제하려는 과정에서 생기는 비극을 보여준다. <롤리타>, <배리 린든>, <아이즈 와이드 셧>은 각각 금기된 사랑, 급격한 신분 상승에서 오는 불안함, 안정적인 중산층의 삶으로 채울 수 없는 텅 빈 내면과 마주하며 망가져 가는 주인공들의 파멸을 다룬다.

<샤이닝>에서 문제 있는 인간성은 ‘흔적’으로 나타나고 곧 공포의 핵심으로 작동한다. 호텔이 영업을 마치기 전, 잭의 가족들은 지배인인 올만에게 호텔에 대한 설명을 듣던 중 총주방장인 할로렌을 만난다. 할로렌은 대니에게 아이스크림을 주며 초능력인 ‘샤이닝’을 설명하고 237호에 절대 들어가지 말라며 경고를 한다. 대니는 237호에 무엇이 있냐고 묻고 할로렌은 아무것도 없지만 들어가지 말라며 이런 대사를 한다.

“아주 나쁜 일이 벌어지게 되면, 그 일로 인해서 어떤 흔적이 남게 된단다. 그런데 그 어떤 흔적이 또 다른 나쁜 일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

영화에서는 웬디가, 영화밖에서는 관객이 마주하는 <샤이닝>의 가장 공포스러운 장면은 도끼 살인도 아니고 미로 속 추적도 아닌 누런 종이 위에 끝없이 타이핑된 문장이다.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잭은 바보가 된다)는 잭의 모든 문제를 함축한다. <샤이닝>의 잭은 호텔을 통제하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있는 안정적이고 편한 ‘현재’의 일자리가 없어질 거라 생각하며 스트레스를 받고, ‘미래’에 명성을 떨칠 괜찮은 글을 쓰지 못하는 텅 빈 내면과도 맞서야 한다.

영화 <샤이닝> 스틸이미지

현재가 불안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는 잭은 결국 과거로 시선을 돌린다. 시선이 멈춘 곳은 1921년 7월 4일. 대공황 이전에 화려한 번영이 있던 광란의 20년대의 출발점. 잭은 황금으로 둘러싸인 연회장에서 재즈 시대의 귀신들과 영원한 무도회를 즐긴다. 자신만의 황금시대를 꿈꾸며 현재를 덧없이 보내는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의 공포 버전처럼 반복되는 과거로의 회귀가 이 위험한 짐승에게 기어이 영원한 생명력을 부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위험한 짐승에게 사로잡혀 영원히 공포에 떨어야 할까. 성악설에 가깝고 염세적인 큐브릭 감독이지만 <샤이닝>에서만큼은 우리를 영원한 공포에 내버려 두지 않으려는 것 같다. 최후의 추격전에서 잭과 대니는 발목까지 눈이 쌓인 미로 속으로 들어간다. 긴박한 추격전의 결과, 대니는 무사히 미로를 빠져나와 웬디와 스노우캣을 타고 호텔을 탈출한다. 잭은 미로 속에서 동사한 채 아침을 맞이한다.

이런 결과를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 바로 흔적에 대한 대응이다. 잭에게 언제 붙잡혀도 이상하지 않을 절체절명의 순간, 잭은 대니의 흔적인 발자국만 따라가지만 대니는 자신의 흔적인 발자국을 지운다. 우리에게도 선택이 남았다. 과거의 흔적만 쫓다가 황금시대에 박제된 냉동인간이 될 것인가, 과거의 나쁜 흔적들을 지우고 미로를 빠져나가 새로운 삶을 살 것인가. 이제 곧 눈 내리는 계절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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