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정체가 무엇이냐. 액받이 무녀로 들어와 자신의 침상을 지키고 있던 연우를 쓰러뜨리며 내뱉은 휜의 외마디 질문은 바로 저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은 환상의 존재로 아른거리는 연우, 월의 존재를 향한 애틋함 때문이 아닙니다. 지나가버린 시간, 달라진 신분 격차를 뛰어넘는 인연의 끌림이 주는 혼란 때문도 아닙니다. 아마도 작가가 의도했을 이런 공감의 감정들 때문에 연우의 정체가 궁금했던 것이 아니란 거죠. 전 그냥 배우 한가인이 궁금했습니다. 그녀가 왜 그렇게 연기하고 있는지, 그 의도를 도통 알 수가 없었거든요.

무려 무녀입니다. 액받이라는, 다른 이의 저주를 그냥 온몸으로 받아내기 위한 도구로 쓰여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인격도 가치도 인정받지 못하는 그저 부적 취급을 받는 최하층의 저열한 삶입니다. 아무에게도 연을 허락하지 못하고 이름도 부여받지 못해 기억을 잃은 아기씨로 불리는 삶을 4년이나 살아왔습니다. 천박함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지위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태도를 보여야 하는 순간이 분명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당연히 발견되어야 하는 모습의 일면은 양가집 규수가 아닌 무녀의 신딸로서의 낮아짐, 그도 아니라면 혼란과 체념, 불안정함과 두려움입니다.

하지만 한가인의 월은 전혀 그런 어두움도 그림자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매번 말은 자신이 천한 무녀라고 낮춤을 말하고,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은 어쩔 수 없음을 잘 아는 반응을 입으로는 말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녀가 무녀의 비루함과 비극을 표현하는 방식은 그저 위험에 처할 때마다 예의 자신의 전작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눈을 똥그랗게 뜨며 정면을 응시하는 것 밖에는 없어요. 이래서야 사람이 아닌 부적임을 용인하는 그녀의 체념과 수용의 모습이 전혀 이해되지를 않아요.

현재는 무녀이지만 비록 기억은 못한다 해도 한때 세자빈의 반열에까지 올랐던 사람이니만큼 자신의 총명함과 호기심, 우아함을 겸비한 타고난 성품을 가릴 수는 없기에 그런 것일까요? 그도 그렇지 않습니다. 별다른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말의 어조는 위급한 상황에서는 이상하게 잔잔하고, 흥분되는 상황에서는 갑자기 훈계조로 변합니다. 품위와 여유가 아닌 그저 대사를 그대로 재생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감정의 기복도 없습니다. 다들 이해하고 있는 사실을,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았나요? 적어도 지금 한가인은 연우를 확실하게 소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품어내야 하는 매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그리고 이런 덜컹거림은 수시로 플래시백되는 과거 회상 장면 때문에 더더욱 도드라집니다. 완벽하게 어린 연우가 되었던 아역들의 절절했던 기억은 시청자들에게 지금의 밋밋하고 어색한 연우가 아닌 다시 김유정의 연우였던 그 당시로 돌려놓으라는 바람을 자연스럽게 꺼내게 만듭니다. 어떻게든 아역과의 연결점을 끊고 지금의 성인 연기자에게 익숙해 질 수 있도록 도와야함에도 과거를 잃어버린 연우가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반복되어야 하는 회상 장면이죠. 제작진으로서는 지금의 한가인에게 힘을 싫어주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과거 장면을 배제시킬 수도 없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 빠져 버렸어요.

벌써부터 생방송처럼 진행되는 촬영 일정 탓에 방송국의 요구인 80분 확대 편성도 맞추지 못하는 형편에 배우들의 연기 지도는 꿈도 꾸지 못하는 형편일 겁니다. 지금의 절망적인 한가인의 연기는 주위의 도움이나 수정이 아닌 그녀 스스로의 발전으로만 해결될 수밖에 없다는 거죠. 하지만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앞으로도 회상 장면은 줄기차게 이어질 것이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김유정의 놀라운 연기와 어린 연우를 그리워하며 한가인의 밋밋함을 비난하게 될 것입니다. 제작진이 배우의 발연기를 돋보이게 부각시키는 아이러니이죠.

그리고 이 여파는 시청자들의 시선끌기로 삽입되었을 한가인의 목욕 신마저 별다른 화제를 불러오지 못하는 효과까지 불러오고 있습니다. 사극에서 의당 되풀이되는 이런 식의 노출은 너무 속내가 뻔해서 식상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평소 같으면 그래도 여주인공의 노출신으로 별의 별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발연기 논란을 잠시 잠재우겠지만, 지금껏 이렇게까지 외면 받은 여주인공의 목욕신이 또 있었을까요? 심지어 그 전회 김수현의 목욕신보다도 못한 굴욕적인 반응이에요. 이런 반응이 보여주는 포인트는 확실합니다. 지금 그녀가 해야 할 것은 이런 어설픈 노출이 아닌 연우로서의 삶을 투영해줄 연기입니다. 미녀 CF스타 한가인의 노출이 아닌 노련하게 후배들을 이끌며 극을 주도하는 여배우의 매혹적인 연기가 보고 싶다는 것이죠. 하지만 정말 이러다간 까마득한 연기 후배를 인도하기는커녕, 점점 더 빛을 내고 있는 후배 김수현에게 끝까지 묻어가게 생겼습니다. 그녀에겐 주목받지 못하는 노출 연기보다 이런 후배에게 연기로 묻어가는 상황이 훨씬 더 굴욕적이에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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