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단현상은 심각하게는 금지 약물을 복용한 후에 겪는 치명적인 후유증, 가볍게는 먹고 싶은 음식을 끊었을 때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며 짜증을 유발하는 불쾌한 경험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의 고단한 일정을 마치고 집에 누워 편안하지만 흥분되는 경험을 선물해주는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이 가끔씩 만들어주는 기분 좋은 설렘도 일종의 금단현상이죠.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음에도 조금만 더 오래 방송해주었으면, 끝난 지 몇 분도 안 되어 다음 주까지 또 어떻게 기다리지 하며 관련 기사와 반응을 체크하게 하는 마법. 잘 만들어진 작품 하나는 사람을 일주일 동안 특정 요일만 계속되었으면 하게 만드는 생활 리듬의 기준점이 되어주고는 합니다.

아역들의 괴물 같은 연기력과 사극을 배경으로 비극과 상상력을 결합한 잘빠진 수목드라마 해를 품은 달 역시도 벌써부터 이런 금단현상을 조금씩 시청자들에게 퍼트리고 있습니다. 이미 성인 연기자들에게 바턴을 넘긴 똘똘한 아역 배우들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벌써부터 원작에서 드러난 슬픈 운명의 사람들에게 애끓는 정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방송되었으면, 어서 빨리 수목이 돌아와서 다음 방송분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기다림을 만들고 있는 것이죠.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진 이상, 이 드라마는 실패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급작스럽게, 혹은 감사하게도 해품달의 방송 시간이 20분이나 늘리겠다는 경사가 예고되었습니다. 이번 주 7화는 아역들에게 익숙해져 있었기에 성인 연기자들에게 좀 더 천천히 적응할 수 있게 해주는 길들여지기의 시간이었습니다. 동시에 누적되어 있던 갈등관계가 서서히 표면화될 수 있도록 정지작업을 해주는 국면이었죠. 제작진이 다루어야 하는 내용도, 시청자들이 새롭게 학습해야 하는 부분도 많았기에 이 여분의 시간은 무척이나 소중했습니다. 그렇게 따지기 전에 해품달을 20분이나 더 볼 수 있다는 예고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즐거운 일이었죠.

하지만 이런 시간 연장이 과연 축복일까요? 오히려 조금 뒤에 이어지게 될 엄청난 재앙의 예고가 아닐까요? 이번 연장 결정은 MBC 보도국 기자들의 제작거부에 의한 불가피한 꼼수였습니다. 일선 기자들의 업무 공백으로 뉴스 자체가 제작되기 어려워지자 뉴스 뒤 프로그램인 해품달의 방송 시간을 황급하게 늘려 놓은 것이죠. 이런 공백은 이날 내내 MBC 뉴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기존의 아나운서들이 교체되기도 하고, 현장 자료나 구체적인 뉴스보다는 단신으로 짤막하게 대체되는 방송사고급 뉴스들이 반복되었죠.

어차피 보지도 않는 뉴스, 해품달만 오래 볼 수 있으면 무슨 상관이냐구요? 보도의 공정성 회복이나 편파적인 뉴스 보도의 문제점 같은 골치 아픈, 혹은 일부의 주장일 수 있는 것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구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 귀를 기울어야만 한다는 딱딱한 소리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MBC 기자들의 파업에 정당성을 강요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이 모든 것을 별외로 하더라도, 해품달 드라마 자체에만 집중했을 때에도 과연 이런 파행 운영이 도움이 되는 것일까요? 아니 가능은 한 것이었을까요?

이 드라마는 축적해놓은 촬영분이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닙니다. 원작의 드라마 제작 소식은 애초부터 들려왔었지만, 남녀 주인공 캐스팅 모두 혼선을 겪었었고, 그 와중에 촬영 일정은 굉장히 빡빡한 상태로 시작했습니다. 아역들의 하차와 성인 연기자들의 촬영장 소식이 거의 실시간으로 전달될 정도로 벌써부터 생방송 식 촬영과 편집의 위험을 앞두고 있죠. 그런 와중에 20분의 추가 방송분을 확보한다는 것은 제작진과 배우들에겐 지옥 같은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도 만약 수요일 하루가 아닌 목요일까지도 이어지게 된다면 그렇게 늘어난 40여분은 독립된 1화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분량입니다. 엄청난 추가 부담인 셈이죠. 이런 과부하는 앞으로 점점 더 이 작품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독이 될 가능성이 큰 대형 참사를 예고할 시한폭탄이 될 것이었어요.

게다가 이런 식의 과부화를 요청하는 업무량은 차지하고서라도 한 회 60여분으로 깔끔하게 계산되어 있는 제작진과 작가들의 틀을 상당부분 무시하는 늘어진 전개가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금 더 느긋하게, 보여주고 싶은 것들을 폭넓게 표현할 수 있는 기회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편집을 마무리하고 전후 맥락과 호흡 조절을 계산했던 기존의 60여분 방송 분량과는 분명 다른 사족 가득한 방송이 될 수밖에 없어요. 단순히 한두 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극 전체의 균형감 있는 전개에도 문제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기형적인 편성 예고입니다. 그러니 방송사의 애타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해품달은 도리어 지난주보다 적은 60분을 겨우 채우고 예고편도 완성시키지 못한 채로 힘겹게 7화를 마무리했습니다. 오죽했으면 방송국 지시도 맞추지 못했을까요. 시청자에게 이렇게도 낚시질을 해놓고 지키지 못했을까요. 시끌벅적했던 확대편성 예고는 이전보다 빨리 시작해서 훨씬 더 빨리 끝내는 시청자를 속이는 얄팍한 조작 방송으로 끝나버렸습니다.

결국 전혀 상관없는 보도국의 사건 같지만, 이런 식으로 정상적인 방송국 운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아끼는 드라마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는 문제를 불러옵니다. 굳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라고 강요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엇이 공정하고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에 대한 판단도 각자의 몫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괴상하게 일그러진 편성이 난무하는 지금의 현실. 좋아하는 드라마 하나도 똑바로 보고 즐길 수 없게 하는 꼼수로 가득 차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직시하고, 알아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단지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20여분 더 볼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다가 방송사의 낚시질에 허탈해한다면, 그리고 그 배후의 이런 문제들을 외면해버린다면, 우린 이 드라마를 좋아했던 이유와 장점들이 하나둘씩 무너져버리는 처참함을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작은 휴식이 되어 줄 드라마 하나 보는 데에도 전혀 엉뚱한 문제 때문에 머리를 지끈거려야 하다니. 지금의 대한민국은 확실히 정상이 아니에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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