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단현상은 심각하게는 금지 약물을 복용한 후에 겪는 치명적인 후유증, 가볍게는 먹고 싶은 음식을 끊었을 때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며 짜증을 유발하는 불쾌한 경험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의 고단한 일정을 마치고 집에 누워 편안하지만 흥분되는 경험을 선물해주는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이 가끔씩 만들어주는 기분 좋은 설렘도 일종의 금단현상이죠.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음에도 조금만 더 오래 방송해주었으면, 끝난 지 몇 분도 안 되어 다음 주까지 또 어떻게 기다리지 하며 관련 기사와 반응을 체크하게 하는 마법. 잘 만들어진 작품 하나는 사람을 일주일 동안 특정 요일만 계속되었으면 하게 만드는 생활 리듬의 기준점이 되어주고는 합니다.
아역들의 괴물 같은 연기력과 사극을 배경으로 비극과 상상력을 결합한 잘빠진 수목드라마 해를 품은 달 역시도 벌써부터 이런 금단현상을 조금씩 시청자들에게 퍼트리고 있습니다. 이미 성인 연기자들에게 바턴을 넘긴 똘똘한 아역 배우들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벌써부터 원작에서 드러난 슬픈 운명의 사람들에게 애끓는 정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방송되었으면, 어서 빨리 수목이 돌아와서 다음 방송분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기다림을 만들고 있는 것이죠.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진 이상, 이 드라마는 실패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이런 시간 연장이 과연 축복일까요? 오히려 조금 뒤에 이어지게 될 엄청난 재앙의 예고가 아닐까요? 이번 연장 결정은 MBC 보도국 기자들의 제작거부에 의한 불가피한 꼼수였습니다. 일선 기자들의 업무 공백으로 뉴스 자체가 제작되기 어려워지자 뉴스 뒤 프로그램인 해품달의 방송 시간을 황급하게 늘려 놓은 것이죠. 이런 공백은 이날 내내 MBC 뉴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기존의 아나운서들이 교체되기도 하고, 현장 자료나 구체적인 뉴스보다는 단신으로 짤막하게 대체되는 방송사고급 뉴스들이 반복되었죠.
이 드라마는 축적해놓은 촬영분이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닙니다. 원작의 드라마 제작 소식은 애초부터 들려왔었지만, 남녀 주인공 캐스팅 모두 혼선을 겪었었고, 그 와중에 촬영 일정은 굉장히 빡빡한 상태로 시작했습니다. 아역들의 하차와 성인 연기자들의 촬영장 소식이 거의 실시간으로 전달될 정도로 벌써부터 생방송 식 촬영과 편집의 위험을 앞두고 있죠. 그런 와중에 20분의 추가 방송분을 확보한다는 것은 제작진과 배우들에겐 지옥 같은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도 만약 수요일 하루가 아닌 목요일까지도 이어지게 된다면 그렇게 늘어난 40여분은 독립된 1화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분량입니다. 엄청난 추가 부담인 셈이죠. 이런 과부하는 앞으로 점점 더 이 작품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독이 될 가능성이 큰 대형 참사를 예고할 시한폭탄이 될 것이었어요.
결국 전혀 상관없는 보도국의 사건 같지만, 이런 식으로 정상적인 방송국 운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아끼는 드라마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는 문제를 불러옵니다. 굳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라고 강요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엇이 공정하고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에 대한 판단도 각자의 몫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괴상하게 일그러진 편성이 난무하는 지금의 현실. 좋아하는 드라마 하나도 똑바로 보고 즐길 수 없게 하는 꼼수로 가득 차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직시하고, 알아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단지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20여분 더 볼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다가 방송사의 낚시질에 허탈해한다면, 그리고 그 배후의 이런 문제들을 외면해버린다면, 우린 이 드라마를 좋아했던 이유와 장점들이 하나둘씩 무너져버리는 처참함을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작은 휴식이 되어 줄 드라마 하나 보는 데에도 전혀 엉뚱한 문제 때문에 머리를 지끈거려야 하다니. 지금의 대한민국은 확실히 정상이 아니에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