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는 99년 삼성과 완전 분리됐습니다. 물론 이번 사태가 그 이전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중앙일보가 삼성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아니냐는 독자와 국민 여러분의 우려가 있음을 저희는 이번 사태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다시 한번 주위를 꼼꼼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부적절한 관행이 혹 남아 있다면 이를 과감히 끊어버리겠습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중앙일보는 신뢰받는 정론지로서, 삼성은 일류 기업으로서 각기 제 갈 길을 가야 합니다.”

언론시민 단체의 성명서가 아니다. 지난 2005년 중앙일보가 자신들의 지면(2005년 8월5일자 2면)을 통해 ‘다짐’한 ‘선언문’이다. ‘삼성 X파일’ 파문이 불거진 이후 추락한 중앙일보의 위상을 이 같은 다짐을 통해 독자와 국민에 대한 신뢰회복의 계기로 삼겠다는, 중앙일보 기자들의 공개선언문이다.

중앙일보와 삼성, 제 갈길 가야 한다던 중앙 기자들…과연 그러한가

▲ 중앙일보 2005년 8월5일자 2면.
당시 중앙일보 기자들의 이 같은 선언문에 대해 언론계 안팎에서는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는 평가와 함께 ‘생색내기용’에 불과하다는 대조적인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중앙일보 기자들을 중심으로 이 같은 ‘선언’을 공개적으로 이끌어낸 것 자체를 폄하하거나 비난하는 이들은 드물었다. 그만큼 ‘2005 중앙일보 기자선언’ 자체가 언론계 안팎의 뜨거운 관심과 호응을 받았다는 말이다.

‘2005 중앙기자들의 다짐’을 이 시점에서 다시 꺼내든 건, 이 같은 기자들의 다짐이 중앙일보 지면을 통해 제대로 실천되지 않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중앙일보가 삼성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단정할 수 있을 만큼 최근 지면에서 이 같은 경향이 뚜렷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오늘자(5일)의 경우만 해도 ‘삼성과 밀착된 중앙일보 지면’의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대다수 신문이 1면에서 삼성 이건희 회장의 특검 소환 소식을 보도한 반면 중앙일보만 이를 10면에서 이건희 회장의 발언을 제목으로 뽑아 ‘간단히’ 보도했다. 뿐만 아니라 중앙은 사설을 통해 “법대로 처리를 하되 삼성을 살리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회장까지 특검에 출두한 마당에 이제는 삼성 문제를 어떻게 종결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며 ‘친 삼성 행보’를 이어갔다.

2005년 8월 중앙일보 기자들의 선언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이 같은 주장을 2008년 4월5일 사설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그리 유쾌하진 않다.

▲ 한겨레 4월5일자 3면.
사주로부터의 독립 외친 중앙일보 기자들 … 과연 독립적인가

최근 중앙일보 지면을 보면서 느낀 또 다른 회의와 한계는 바로 홍석현 ‘사주’와 관련된 것들이다. 지난 2005년 8월5일, 중앙일보 기자들은 기자와 사주와의 관계를 이렇게 정리했다.

“중앙일보는 정파적 이해관계에 스스로를 얽어 넣었던 불행한 과거가 있습니다. 하지만 반성과 깨달음을 통해 새 출발을 다짐했고, 2002년 대선 보도 등을 통해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통해 저희는 언론이 특정 정파나 사주 기업 등의 이해관계에 휘말릴 경우 엄청나게 큰 후유증을 겪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절감했습니다. 저희 기자들은 공정보도위원회의 내부감시 활동을 강화하는 등 객관적이고 공정한 보도를 위한 발걸음을 더욱 재촉할 것을 다짐합니다.”

하지만 별로 크게 절감한 것 같지도 않고 내부 감시 활동을 강화한 것 같지도 않다. 멀리 갈 것 없다. 최근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것들.

▲ 중앙일보 4월5일자 10면.
지난 3월4일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 삼성특검팀으로부터 소환조사를 받는다는 소식을 대다수 신문이 3월4일자를 통해 비중 있게 보도했지만 중앙일보는 단 한줄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삼성특검팀에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된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 조사를 마치고 나올 때 중앙일보 기자 4~5명이 홍 회장을 취재하는 기자들을 가로막아 심한 몸싸움이 벌어지면서 다시 ‘경호원 기자’ 논란이 불거졌다.

진정 독자와 국민을 두려워한다면 ‘이런 짓’은 못한다

또 있다. 지난 3일 대다수 신문들이 삼성 이건희 회장 부인 홍라희씨의 소환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도한 것과는 달리 유독 중앙일보는 단신 수준에 머물렀다. 중앙이 이날 주목한 것은 홍라희씨 소환 사실이 아니라 삼성 사태에 대한 심포지엄이었다. 내용은 대충 짐작하시리라 믿는다.

정리하자. 무너지고 추락한 신뢰를 회복하겠다며 다짐했던 중앙일보 기자들의 2005년 선언문은 이미 ‘휴지조각’이 된 지 오래됐다. ‘진일보한 측면’과 ‘생색내기용 불과’라는 당시 극단적인 평가 가운데 후자의 판단이 옳았다는 말이다. 지금 중앙일보 지면을 보면 오히려 당시보다 더 퇴행적이라는 느낌마저 받는다.

만약 다시 중앙일보가 비슷한 논란에 휩싸이면서 2005년 당시의 비슷한 선언과 다짐문이 나온다면 아마 그때는 ‘양치기 소년’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사람은 한 번 속지, 두 번 속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보면 현재 중앙일보는 상당히 위기다. 2005년 중앙일보 기자들의 ‘다짐’ 가운데 마지막 부분을 중앙일보 기자들에게 다시 선사하는 것도 이런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저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그리고 독자와 국민 여러분께 더 다가가기 위해 신발끈을 고쳐 매겠습니다. 신뢰 회복에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믿습니다. 오늘의 고통과 시련이 중앙일보가 보다 성숙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이제 독자와 국민을 두려워하는 겸허한 자세로 더 힘차게 뛰겠습니다. 많은 격려와 함께 애정 어린 눈길로 지켜봐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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