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의 이야기는 구전은 물론 다양한 문화적 콘텐츠로 재생산되며 널리 알려진 '설화'이다.

고구려 평원왕의 딸 평강공주는 어릴 적부터 울보였다. 울음을 그치지 않는 딸에게 왕은 '바보'로 소문난 온달에게 시집을 보내겠다며 어르고 달랬다. 성장한 공주는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아버지가 어릴 적부터 입버릇처럼 놀렸던 바보 온달과 결혼할 것을 고집한다. 왕은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평강공주를 궁궐 밖으로 내쳤고, 평강공주는 홀로 온달을 찾아간다.

이렇듯 설화 속 평강공주는 스스로 미천하고 가난한, 심지어 바보라고 소문이 난 온달을 자신의 남편으로 ‘선택’한다. 하지만 선택에서 머물지 않고, 남편이 가진 능력을 알아본 공주는 그를 대장군 온달이 되도록 가르친다. 이렇듯 자신의 배우자를 스스로 선택하고, 그의 입신양명에 최고의 조련사가 된 평강공주는 동서를 막론하고 드문 '주체적' 여성의 캐릭터이다.

9월 22일부터 KBS 2TV를 통해 방영되고 있는 <달리와 감자탕>은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의 미술관 버전이 아닐까 싶다.

청송미술관을 떠맡게 된 달리

KBS 2TV 수목드라마 <달리와 감자탕>

평강공주를 쫓아낸 고구려 평원왕과 달리, 청송 미술관장인 달리(박규영 분)의 아버지는 급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달리에게 수십억의 빚만 남긴 채. 세인트 밀러 미술관에서 객원연구원을 하던 달리는 하루아침에 아버지가 남긴 빚을 짊어진 채 존폐 위기의 미술관을 떠맡게 된다.

사람들은 곱게 자란 그녀가 당연히 빚더미인 미술관을 포기하려니 하지만, 평생에 걸쳐 청송미술관을 지켜온 아버지, 그래서 ‘미술관이 곧 아버지’라 생각한 달리는 아버지의 유산인 미술관도, 그 미술관이 짊어진 빚도 기꺼이 감당하려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남긴 집을 팔아 겨우 직원들 월급을 충당해야 할 정도로 빈털터리 달리의 앞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그런 그녀 앞에 세 명의 '흑기사'가 등장한다. 우선 첫 번째 흑기사는 달리의 첫사랑 장태진(권율 분)이다. 달리가 읍소했지만, 그룹 내 자신의 입지를 위해 달리를 밀쳐냈던 그는 달리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 이제 그룹을 좌지우지할만한 위치에 오른 그는 어려움에 처한 달리에게 기꺼이 '키다리 아저씨'가 되고자 한다. 달리에 어울리는 명품 옷 조달부터 미술품 구입 등등 자신이 이제 누릴 수 있는 부와 권력을 얼마든지 달리를 위해 쓸 의지가 있다.

또 다른 흑기사는 한때 달리와 달리 아버지의 도움을 받던 주원탁(황희 분)이다. 보육원 출신으로 형사가 된 그는 달리와 가장 격의 없는 친구이다. 집도 없이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내던 달리가 강도를 만나 가진 돈마저 털리자, 자신이 가진 돈을 털어 직원들 월급을 마련해주고 기꺼이 자신의 옥탑방 방 한 칸을 내준다.

KBS 2TV 수목드라마 <달리와 감자탕>

첫사랑 태진, 그리고 막역한 주원탁. 두 사람은 모두 달리에게 진심이지만 그들의 진심은 지금의 달리에겐 그저 호의이자 부담일 뿐이다. 더욱이 자신이 어려운 시절 달리를 외면했던 태진의 이기적인 결정은 달리에게 큰 아픔으로 남겨져 있다.

그렇게 호의적인 태진과 원탁과 달리, 빚쟁이로 미술관에 들이닥쳐 달리를 난처하게 만든 진무학(김민재 분)은 이상하게 자꾸 엮이게 된다. 아니 정확하게는 진무학이 자꾸 달리 주변을 맴돈다. 달리가 맞닥뜨리는 난처한 상황에 그는 본의 아니게 흑기사가 된다.

나이답지 않게 '똥싸고 있네'를 거침없이 내뱉는 진무학은 아버지와 함께 돈돈 F&B를 이끄는 젊은 사업가이다. 하지만 말이 사업가이지 감자탕 사업으로 잔뼈가 굵은 그는 입만 열면 ‘무학'과 '무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나 무학은 자신의 무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외려 그것이 자신의 장기라도 되듯 야전사령관처럼 감자탕 사업을 통해 얻은 경험적 깨달음으로 세상을 돌파해나간다. 외국어에 능통한, 미술관 관장이 된 달리라고 해서 위축될 무학이 아니다.

<달리와 감자탕>에서 첫사랑 장태진이나 동네 오빠 같은 주원탁은 전형적인 ’키다리 아저씨' 캐릭터들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런 전형적인 캐릭터 대신 진무학을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운다.

KBS 2TV 수목드라마 <달리와 감자탕>

진무학은 가진 게 돈밖에 없는 졸부이지만 대신 그의 이름처럼 '무학'이다. 그런 그가 네덜란드에서부터 우연히 달리와 엮인 후 이제 빚쟁이가 되어 청송미술관에 등장한다. 상황은 달리가 그의 도움을 받는 해프닝의 연속이지만, 드라마는 그런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를 비튼다.

지난 10월 7일 방영된 6회, 달리를 돕기 위해 이른 아침 미술관에 출근한 무학은 미술관 중앙에 낭자하게 펼쳐진 쓰레기더미에 아연실색한다. 감자탕 업소의 위생점검에 철저한 그이기에 솔선수범하는 마음으로 쓰레기를 분리수거해 버린다. 그런데 그 쓰레기가 비엔날레 대상작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예의 '똥'을 운운하며 '누가 작품을 그따위로 하냐’며 그 쓰레기의 주인인 홍지영 작가 앞에서 막말을 해버린 무학.

그렇게 드라마 속 무학은 배운 것 없는 온달처럼 아는 게 없다. 그런 그의 무지가 번번이 달리를 위기에 처하게 한다. 하지만 그렇게 무식한 무학이 바로 7개 국어에 능통하고 석박사 학위를 가진 달리 캐릭터를 살아나게 한다. 비록 지금은 가진 것 없이 빚더미에 앉아 있지만 그녀가 가진 '문화적 내공'이 무지한 무학의 '견인차'가 된다.

KBS 2TV 수목드라마 <달리와 감자탕>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의 방식으로 무학이 가진 재력과 능력이 달리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만, 드라마는 거기서 달리의 ‘주체성’을 살려내기 위해 무학의 캐릭터를 '무학'으로 설정한다.

돈이 안 되는 것들은 모조리 '똥'이라 여기며 살아왔던 젊은 졸부 무학. 그는 이제 빚만 지고도 당당하게 아버지의 유산을 지키려는 '문화 능력자' 달리를 만나 거듭나게 된다. 문화적 평강공주 달리는 돈밖에 없는 무학을 청송미술관이란 공간을 배경으로 '장수 온달'로 거듭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달리라는 한 여성이 자신의 능력으로 아버지의 유산을 지켜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미술관이라는 색다른 배경은 그렇게 현대판 평강공주가 온달을 제련하는 용광로로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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