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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노 타임 투 다이’ 007다웠던 퇴장, 제임스 본드 귀환의 조건은?[미디어비평] 톺아보기
미디어평론가 이정희 | 승인 2021.10.08 11:17

[미디어스=이정희] 청소년 시절 방학 때 지방 친척집에 가면 서울에서 온 조카들을 대접하신다며 인심 쓰듯 극장에 보내주셨다. 덕분에 그 시절 개봉한 007시리즈를 볼 수 있었다. 대부분 '로저 무어'가 주인공인 작품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조카들에게 보여줄만한 영화는 아니었는데, 당시만 해도 007은 방학을 겨냥한 대표적인 '텐트폴' 액션 히어로물이었기에 폼나는 선물 같은 영화였다. 

청소년 시절의 히어로물 007을 오랜만에 봤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퇴장 작품이라는 소식을 듣고서이다. 어린 시절부터 각인된 007은 '로저 무어' 같은 모습이라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007을 굳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막상 ‘가장 007답지 않은 외모로 가장 007스러웠다’는 평가를 받았던 다니엘 크레이그가 퇴장한다니 궁금해졌다. 사실 <1917>의 샘 멘데스 감독이 연출한 <007 스펙터>를 큰 화면에서 보고 싶었는데, 그 기회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캐릭터 포스터

몇십 년 전 극장에서 마주했던 사자가 여전히 포효하는 유니버설 픽쳐스의 로고를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시나 이스턴'이 부르던 'for your eyes only'가 울려 퍼지던 몽환적인 뮤비 같던 오프닝의 기억을 빌리 아일리시의 'No Time To Die'가 소환했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생존'을 넘어 건재한 레전드였다. 하지만 엔딩 크레딧이 끝나고 등장한 문구, 다시 돌아오겠다는 제임스 본드.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의문부호가 남는다. 

미소 냉전시대 '첩보전 소설'인 이언 플래밍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기반으로 한 007 시리즈 영화는 소련이라는 적대국가 대신, 그에 버금가는 악의 축 '스펙터'라는 전 세계적인 조직을 상대로 하여 첩보 작전을 벌인다. 또한 정의의 대변자는 미국의 CIA가 아니라 영국 정보부, 그중에서도 살인면허를 받은 00으로 시작된 스파이들이다. 

세상이 변했다 

<노 타임 투 다이>에서 M으로 분한 랄프 파인즈는 회의한다. 나노봇과 DNA 조작을 이용한 생물학적 신무기를 살포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인 면허'를 앞세운 첩보전은 이제는 '몸에 맞지 않은 옷'과 같은 처지이다. 여전히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거대한 악의 조직의 존재는 엄정하지만, 그들의 무기는 살인면허를 지닌 스파이 007이 감당할 수준을 넘어선 세상이 된 것이다.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스틸 이미지

영국 정보부가 은밀하게 연구하고 있던 생물학적 신무기를 빼내 그걸로 007을 죽이려 했던 작전, 그러나 연구자의 조작으로 그 자리에 있던 적들을 압살하고 마는 장면이라던가, 그저 목을 조르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적의 목숨을 거두게 되는 미필적 고의의 상황을 빚어내는 생물학전의 세상에서 과연 007이라는 살인면허를 가진 스파이의 존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고 영화는 제 먼저 '회의'한다. 

그런 면에서 다니엘 크레이그라는 배우의 결심이 아니라도 007이라는 첩보원은 존재론적으로 시대와 엇물리는 존재가 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적과 맞부딪치는 상황에서 007의 존재는 여전히 신출귀몰함을 <노 타임 투 다이>는 증명한다. 스피디하게 압도적으로 진행되는 액션씬은 007의 건재를, 불에 타 수장되는 배에서의 생존씬이나 고전미 물씬 풍기는 '애스턴 마틴'을 비롯한 카체이싱 씬들, 그리고 스펙터의 기지에 홀로 남아 미션을 완수하는 엔딩에 이르기까지 007은 여전히 007이었다. 

다니엘 크레이그를 6대 007로 선택하고 이언 플래밍의 소설 1편 <카지노 로얄>을 통해 전통과 현대를 이어오던 시리즈. 이제 <노 타임 투 다이>를 통해 007의 장렬한 퇴장과 함께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어울리는 첩보물로서의 과제를 물려받게 되었다. 과연 다중을 상대로 한 맹목적인 생물학적 범죄가 난무하는 세상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개인'으로서의 해결사는 유효할까? 

제임스 본드는 어떤 캐릭터여야 할까?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포스터

또한 007이란 스파이의 캐릭터적 특성 역시 과제로 남게 된다. 007 영화가 개봉을 앞두면 이른바 본드 걸의 존재가 화제였다. 하지만, 더는 여성을 대상화시키는 바람둥이와 같은 캐릭터가 환대받을 수 없는 세상에서 다니엘 크레이그 버전의 007은 순애보의 역사를 새로 써나갔다. 

물론 순애보라고 쓰면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여성들과 서로 다른 로맨스로 매 시리즈를 채운 007. 다니엘 크레이그 버전의 엔딩은 지금까지 007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가족'에 방점을 찍으며 퇴장한다. 별처럼 쏟아지는 미사일 아래 굳건하게 서 있는 007. 늘 리버럴한 개인주의자였던 영국 정보부 요원 007이 새삼스럽게 숭고한 애국주의가 아니라, 그가 진정 지켜야 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모습은 그래서 007다웠다. 

또한 제아무리 멋진 캐릭터였지만 살인면허를 남발했던 스파이였기에,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나노봇'으로 인한 숙명을 기꺼이 감수하는 모습 또한 스파이의 최후다웠다. 반면에 <노 타임 투 다이>의 원죄를 조장한 정보부 수장 M의 생물학적 무기 연구 묵인에 대한 대가는 어물쩍 넘기며 오락영화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스틸 이미지

007의 'I will be back'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시대의 변화에 걸맞은 남성 캐릭터에 대한 고심이 더해져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부재를 채운 신입 007이 흑인에 여성이라는 변주는 신선하다. 다음에 돌아올 007이 여성이거나 흑인이면 안 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변두리 출신의 사투리를 쓰는 백인 남성을 주인공으로 삼았던 <킹스맨>의 변주와 같은 방식도 있다. 그럼에도 제임스 본드라는 '전통'을 지켜가는 방식도 있을 것이다. 

누가 다음 007이건 <노 타임 투 다이>가 엿본 가능성, 그리고 신입 007과 레전드 007의 알력 아닌 알력과 존중의 장면은 '젠더'의 대결을 넘어선 선후배의 예우로서 멋진 장면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또한 여전히 아름답고 젊은 여성들의 활보에도 불구하고, 그 여성들의 활약이 씨퀀스마다 007이란 캐릭터와 함께 호흡을 맞췄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즌의 가능성을 연다. 쿠바에서 만난 이제 30일 되었다는 신입 요원 팔로마. 다니엘 크레이그와 함께 출연했던 <나이브스 아웃>의 순수한 마르타였는가 싶게 여성적인 매력을 뿜어내며 등장했지만, 007과의 첫 임무에 앞서 단번에 마티니를 들이키는 초조함과는 달리 걸출한 능력을 선보이며 시선을 사로잡는다. 

007의 마지막 연인이 된 스완(레아 세두 분) 역시 그저 사랑스런 여성을 넘어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총을 들 수 있는 주체적인 캐릭터로 설정된다. 아마도 007을 바라보는 눈물 어린 순정의 눈빛이 캐스팅의 결정적인 요인이지만, 영화의 서막을 여는 어린 스완의 선택은 스완이라는 캐릭터가 그저 '보호' 대상만은 아님을 보여주려 애쓴다.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캐릭터 포스터

어린 시절 만났던 로저 무어의 007은 그저 턱시도를 입은, 멋진 척하는 남자였었다. 하지만 다시 본 007은 다니엘 크레이그라는 배우의 캐릭터가 고스란히 입혀진 역할이 되었다. <노 타임 투 다이>는 네 편의 시리즈를 통해 자신 안에서 우러난 007 배역을 탄생시킨 다니엘 크레이그에 대한 전적인 '헌사'에 다름 아니다. 스펙터도, 사핀도 이름만 무성할 뿐 다니엘 크레이그의 '커튼콜'을 위한 그럴듯한 소동극으로 자리매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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