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민주주의 사회라지만, 여전히 우리에겐 삶의 곳곳에 역사와 전통의 잔영들이 남아 있습니다. 종교의 힘이 강하다지만 신자들의 초점은 내세가 아닌 현실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공부를 통한 출세라는 입신양명은 전 세계가 놀라는 교육열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선출하고 뽑은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이자 국가원수가 아닌 나라의 큰 어른, 혹은 아버지의 이미지를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대통령이기보다는 왕이 되기를 원하는 묘한 기대감.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는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보다 과도한 책임을 묻는 풍토는 오랜 왕정 시대가 남긴,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독재 정부가 잔존시킨 기억의 흔적들이죠.

그래서 우리가 사극에서 만난 왕들 역시도 이런 아버지의 풍모를 풍기는 노년의, 적어도 중년의 어른이었습니다. 그것은 사극들이 다루고자 하는 시기와 사건들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지만, 그와 동시에 시청자들이 바라는 왕의 전형적인 모델이 이미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고뇌하는 남자. 혹은 아주 노회한 고집 센 현인. 아주 가끔씩 단종이나 숙종을 그리면서 소년 왕이나 청년 왕을 만나기도 했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궁궐 내 여인들의 치마폭에 휩싸여 정신을 못 차리거나, 권력 다툼의 와중에 쓰러지는 힘없는 희생자가 전부였습니다.

그나마 개혁군주를 그렸던 이산의 미대형, 나름의 파격을 보여준 동이 지진희의 개그왕도 마찬가지의 30대 초반 아저씨였습니다. 가장 개성적이었던 세종의 한석규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이들 나라의 최고 책임자이자 백성의 아버지들은 그 개성이 전적으로 나라를 책임지기 위한 미덕의 일부로만 작용했습니다. 주위에는 여자들이 득실거리고, 그 누구보다도 유능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못할 일이 없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들에겐 수컷의 매력이 배제되어 있었어요. 빼어난 인격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존경할만하고, 혹은 패륜아의 삶을 보이기에 안쓰럽고 안타까울지언정 매혹되거나 반할만한 매력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시대와 공간은 다르지만 모두가 그 근본은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미니미들. 너무나 식상한 연령대 왕들의 반복. 사극을 보면서 제일 익숙한 대상은 바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품은 달은 이런 은연중에 생긴 법칙을 과감하게 깨뜨릴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수많은 우려와 걱정을 너무나 빛나는 존재감으로 단숨에 사라지게 한 기린아 김수현이 새로운 길을 보여준 것이죠. 여전히 앳된 청년왕. 하지만 총명하고 시크하며 매력적이지만 순정적인 남자.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모두 이해하면서도 홀로 고고하게 무너지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매혹적인 국왕. 그야말로 남자라도 반해버릴 만한 나쁜 남자가 왕이 된 그림을 보여줄 수 있음을 예고하는 첫인상이었어요.

그다지 우호적이지는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아역 사상 최고의 연기라고 해도 좋을 올해의 발견, 여진구의 빼어난 열연을 이어받아야 했습니다. 전작들에서의 활약으로 분명 능력을 인정을 받는 신예였지만 첫 번째 단독주연(물론 드림하이도 있었지만 이 팬들을 위한 거대한 이벤트를 드라마로 보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것도 첫 번째 사극이라는 우려 역시도 분명 있었습니다. 미지수의 신예와 젊은 연기자들로 가득한 해품달에서 과연 그가 드림하이에서처럼 중심을 잡아줄 수 있을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조마조마했던 것도 사실이죠.

하지만 이 놀라운 재능의 배우는 모든 걱정이 기우였음을 단 1회 만에 당당하게 증명했습니다. 눈빛 하나, 손짓 하나로도 광기와 절망을 품고 있는, 하지만 그 와중에도 현실을 잊지 않는 균형감각을 품은, 이 격정적인 청년왕의 마음을 전달합니다. 노회한 어른들의 음흉한 심보와 계산을 모두 통찰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며 격정에 빠져 망가지지 않습니다. 세상을 비웃는 차가운 시선을 던지면서도 과거의 잃어버린 사랑을 그리워하며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순정을 품고 있습니다. 한없이 어둡지만 동시에 한없이 따스한 남자. 많은 이들이 상상하는 나쁜 남자. 하지만 나한테만 착한 남자라는 로망을 확실하게 충족시켜줄 수 있는 새로운 캐릭터가 그것도 왕의 신분으로 등장한 것이죠.

무척 흥미로운 접근이고, 재미난 해석입니다. 자못 충격적인 첫 등장이었구요. 외형과 구조는 조선시대에서 빌려왔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의 공간인 해품달에서나 가능한 왕이거든요. 어디까지나 있었던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극의 테두리를 벗어난 자유스러움이 만들어준 파격. 시크한 청년 절대 권력자의 모습은 이 드라마를 즐기는 주요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그 재미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김수현의 배우로서의 가치는 점점 더 높아질 것이구요. 너무 폭삭 늙어버리거나, 도저히 연결이 안 되거나,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기에 아역이 그리워지는 연기를 했던 함께 등장한 성인 배역 동료들은 조금은 실망스러웠습니다. 김수현 역시도 순간순간 다소 들떠 보였던 것도 사실이죠. 하지만 그의 나쁜남자 왕은 분명 미래를 기대해볼만한 주목할 만한 첫인상이었어요. 더 이상 유망주가 아닌 한 사람의 당당한 배우라는 강렬한 자기증명. 물론 다른 모든 기회가 그런 것처럼 그 모든 결실은 준비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고, 단 1회를 보고 마지막의 성과까지 예측하는 것은 섣부른 예단이겠지만 그는 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를 제대로 붙잡았습니다. 2012년 상반기는 김수현의 것이 될 것이라는 충격을 예고한 등장이에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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