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7 노 타임 투 다이>에 대한 강력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디어스=고브릭 실눈뜨기]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는 살인 면허를 반납하고 연인 매들린(레아 세이두)과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본드는 이탈리아 마테라에 있는 베스퍼 린드(에바 그린)의 무덤을 찾아 과거와 죄책감을 모두 내려놓고 새로운 출발을 꿈꾸지만, 정체불명의 악당들에게 습격을 당한다. 본드는 매들린을 의심하며 그녀를 떠나보낸다.

그로부터 5년 후. 자메이카에 잠적해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던 본드에게 CIA 요원이자 친구인 펠릭스(제프리 라이트)와 본드를 대신해 007 코드를 부여받은 노미(라샤나 린치)가 찾아온다. MI6의 비밀연구소가 공격당해 ’헤라클래스‘라는 이름의 생화학 무기를 탈취당했다는 것. MI6의 새로운 수장이 된 말로리(랄프 파인즈)도 본드에게 복귀를 요청한다. 해체된 줄 알았던 스펙터와 감옥에 갇힌 블로펠트(크리스토퍼 발츠)는 건재함을 확인한 본드는 다시 한번 살인면허 007을 받아들인다.

<노 타임 투 다이>는 2006년 <카지노 로얄>에서 시작해 15년 동안 제임스 본드를 맡은 다니엘 크레이그의 공식적인 007 은퇴작이다. 쇠퇴하던 007시리즈의 부흥을 이끈 주인공의 화려한 은퇴식인 만큼 제작비 2억 5천만 달러라는 엄청난 물량을 바탕으로 과거와 현재의 007이 남긴 유산들을 넘나들며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동시에 본드와 매들린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며 기존의 시리즈에서 보지 못했던 감성적 측면의 접근도 성공한다.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시대마다 변하는 007의 고유한 질병

<노 타임 투 다이>의 가치는 블록버스터의 쾌감과 애절한 스토리에서만 그치지 않고 ’적‘에 대한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는 데 있다.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질병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20세기는 피아식별을 통해 낯선 것을 막아야 했던 면역학의 시대다. 초대 007인 숀 코너리에서 5대 피어스 브로스넌까지의 007시리즈는 확실히 면역학 시대의 007이었다. 냉전 시대 서방의 주적은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이었고, 소련의 붕괴 이후엔 신세계를 지배하려는 미치광이들과 맞서 싸웠다.

반면 21세기의 고유한 질병은 긍정성 과잉이다. 가시적인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폭력으로 스스로를 착취하며 자신이 자신을 잡아먹게 된다. 구닥다리 적들과 대치하며 시리즈의 존재 가치를 떨어트리던 007이 기사회생한 것도 21세기의 고유한 질병을 다루면서부터였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에서 주적은 다양한 형태로 등장했지만 결국 제임스 본드의 또 다른 모습들일 뿐이다.

세계 최악의 범죄집단 스펙터의 수장이자 007의 아치에너미인 블로펠트는 본드의 이복형제다. 블로펠트는 본드를 볼 때마다 ’나의 사랑스러운 쿠쿠(CUKCOO)‘라고 말한다. 본드가 둥지를 빼앗는 뻐꾸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블로펠트는 자신에게 와야 할 아버지의 사랑을 본드가 독차지했다는 과대망상에 빠져 사고로 위장해 아버지를 살해하고, 본드의 삶을 망가트리려 모든 자원을 집중한다.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본드를 제일 지독하게 괴롭힌 라울 실바(하비에르 바르뎀)도 본드의 거울상이다. <스카이폴>의 빌런이었던 실바는 뛰어난 해킹 실력을 바탕으로 MI6 요원들의 명단을 공개하고 MI6 본부에 폭탄테러를 하며, 본드의 어머니 같은 존재였던 M까지 죽음으로 내몬다. 실바는 본드가 살인면허를 부여받기 전에 M이 인정하는 뛰어난 MI6의 요원이었다.

<노 타임 투 다이>는 시작부터 과거와의 결별이 주요한 모티브로 작용한다. 과거는 당연히 본드를 포함한 등장인물 모두의 자신과의 과거다. 본드는 베스파 린드에 대한 죄책감, 블로펠트가 본드에게 펼친 가장 악독한 음모인 의심을 떨쳐낼 수 없다. 매들린은 스펙터의 멤버였던 아버지 미스터 화이트가 저지른 업보 때문에 삶을 위협 당한다. 본작의 메인 빌런인 사핀(라미 말렉)은 스펙터 일당이 저지른 폭력의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그 폭력을 내재화해 자신의 삶을 망친다.

블로펠트와 사핀이 써먹는 헤라클레스는 자신에게서 오는 폭력이 사물화된 무기라고도 볼 수 있다. 헤라클레스는 MI6에서 조용한 암살을 위해 개발한 생체무기다. 특정 DNA 구조를 입력해서 ’본인‘이 확인되면 나노봇이 작동해 목숨을 빼앗는다. 나노봇은 당연히 눈에도 보이지 않고 없애는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본인의 DNA와 결별할 수 없듯이 특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존재들에게는 어떤 무기보다 치명적이다. 제임스 본드의 운명은 헤라클래스라는 무기의 등장과 함께 이미 예견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죽음의 시간을 피하는 건 누구인가?

코로나바이러스의 등장과 함께 21세기의 질병도 새롭게 정의될 필요가 있다. 호흡을 통해 전파되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협적인 부분은 친밀한 존재에게서 전파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아(我)와 피아(彼我)라는 이분법이 아닌 인간과 인간의 관계 자체가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노 타임 투 다이>가 코로나바이러스 탓에 개봉이 1년 6개월 이상 연기된 사실은 어떤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007은 이제 목숨을 위협하는 외부의 적을 극복했고, 과거에 얽매여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노 타임 투 다이>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누가 죽었느냐가 아니라 누가 살아남았냐는 것이다.

주요인물 중 유일하게 죽음을 피해간 사람은 매들린이다. 그녀 역시 과거에서 완벽하게 자유롭지는 못했지만 유일하게 미래를 잉태한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녀가 품은 미래는 제임스 본드라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성립되었다. 인간관계는 코로나 시대의 새로운 위협이지만 희망 역시 인간 사이에서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일까. 007 시리즈에서 더 이상 다니엘 크레이그를 볼 수는 없겠지만 제임스 본드는 다시 돌아온다(James bond will return)는 말에 희망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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