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인의 세상입니다. 적어도 요 며칠 동안 각종 홍보자료나 방송 예고들만 보면 그녀는 언제나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상수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가 끝나고 비어버린 수목드라마의 왕좌 자리는 해를 품은 달의 것입니다. 아역들의 열연과 원작에 대한 기대, 사극을 선호하는 최근의 경향 등의 여러 장점들에 힘이죠. 성인 연기자들로의 전환과 함께 이 드라마의 히로인으로 나타날 그녀는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부터 여러 화제를 만들어내며(정확히 말하자면 만들기 위해 노력하며) 여기저기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뭐 여타 드라마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주인공 띄우기의 일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죠.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한가인이 본래 이렇게 주목받는 연기자였었나요? 그녀의 첫 번째 사극 도전이라느니, 오랜 공백기 끝에 결정한 복귀작이라느니 하는 타이틀을 걸고 홍보에 나서고 있지만 그녀의 작품 목록을 보면 말죽거리 잔혹사에서의 인상적인 아우라를 넘어서는 흥행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극의 중심에서 내용을 이끌어갔던 기억도 전무하고, 완성된 배우로서 인정을 받았다기엔 무언가 어색합니다. 그저 연정훈의 아내. CF 스타로서의 이미지가 더 큰 그녀의 복귀작이 이렇게 많은 화제를 불러올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 ⓒMBC 홈페이지

게다가 해품달과 같은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혹은 우월한 지위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애정사의 포인트는 어디까지나 남자 배우에게 맞추어지는 것이 상식입니다. 극의 특성상 주 시청자 층은 여성일 수밖에 없고, 이들 시청자들에게 연모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수많은 역경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이 애달픈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매혹적인 남자 주인공의 매력입니다. 구준표나 걸오앓이, 혹은 시후앓이와 같은 현상은 익히 들어 왔지만 금잔디의 구혜선, 성균관 스캔들의 박민영, 공주의 남자의 문채원 같은 여자 주인공들은 극의 중심으로서 내용을 이끌기 보다는 철저하게 여성 시청자들의 욕망을 대리 충족시켜주는 대상으로만 소비되었습니다. 그녀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것에 국한되었죠. 그녀들은 공감과 부러움, 혹은 질투나 비판의 대상이었지 별다른 관심의 중심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해품달에서는 한가인을 홍보 전략의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제작사가 뿌리는 보도 자료에서도, 방송국에서 틀어주는 홍보 방송에서도 남자 주인공인 김수현과 정일우는 사라지고 오로지 한가인만을 주목하고 있을 뿐이죠. 왜 그럴까요? 그녀의 소속사 힘이 강력하기 때문에? 다른 출연자들에 비해 폭넓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기에 홍보에 용의하기 때문에? 아역 연기자들의 훌륭한 열연으로 시작한 환상적인 출발을 이어받고 그 전환의 충격을 완화하고 싶어서? 모두 일리 있는 이유이지만 그 속내는 보다 복잡해 보입니다. 이 드라마 성공의 성패가 바로 한가인에게 모두 달려있기 때문이죠. 그녀의 연기력 문제가 아닌 한가인이란 배우를 해품달에서 시청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많은 것들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나이의 문제, 경력의 유무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가 이 드라마에서 소화해야 하는 역할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자체나 지나치게 무리수에요. 이미 여러 번에 걸쳐 다양한 분들의 지적이 있어왔지만 그녀의 남자 파트너가 될 김수현과의 그림은 애절한 사랑의 걸림돌이 신분이나 운명이 아닌 나이차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는 구도입니다. 유부녀의 이미지, 나이 차 때문만은 아닙니다. 김수현의 전작 파트너는 드림하이에서 미스에이의 수지였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소화했던 배역들도 모두 해품달 초반을 이끌었던 아역 배우들과 같은 성인 연기자들의 어릴 적 시절이었습니다. 그나마 성인 연기 경험이 많은 정일우 역시 등장은 신세경과 함께였습니다. 반면 한가인의 전작 파트너들은 김남길, 에릭, 양동근, 권상우 등등의 김수현, 정일우에게는 까마득한 선배 연기자들입니다. 그런 기억을 온전하게 가지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이들 사이의 사랑이야기는 전혀 자연스럽지 않아요.

그러니 홍보의 포인트는 대부분 ‘믿을 수 없는 동안 포스’라든지 ‘나이를 잊은 미모’라든지, ‘유부녀답지 않은 자태’같은 식의 나이를 부인하는 기사들입니다. 그녀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시청자들에게 끊임없이 한가인과 배역의 적합성을 각인시키려는 의도에요. 그러니 이 두 사람의 사랑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는 사전 전제를 깔아놓고 시작하고 싶은 제작진의 절박함이 묻어나오는 홍보 전략인 셈입니다. 어찌 보면 애처롭고, 이해는 가지만 조금은 서글퍼요. 굳이 이럴 양이었으면 캐스팅 단계에서 조금 더 심사숙고했으면 좋았을 터인데, 사서 고생이란 말이 나오는 요즘입니다. 무리한 캐스팅 때문에 애꿎은 홍보 파트들만 고생을 하고 있네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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