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스타에 안석환, 박철민, 한상진 등이 출연한다는 소리에 조금은 의아했다. 뿌리깊은 나무의 밀본 두 사람에 대한 궁금증은 있었지만 이들에게서 과연 라디오 스타만의 독한 웃음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었다. 또한 박철민의 반복되는 동어반복적인 드라마 애드리브는 적잖이 식상함도 있어 최근 들어 가장 기대감이 적은 게스트로 여겨졌다. 그러나 결과는 반전 그 자체였다.

물론 이들은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자체발광을 넘어 자체 폭발하는 존재감을 가진 뛰어난 명품조연들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을 명품조연이라 불러야 하는 것에는 약간의 비애가 있다. 안석환은 대학로 역사상 다섯 손가락에 들 정도로 연기력을 인정받았지만 일반 시청자가 기억하는 안석환의 이름은 조연일 뿐이다. 그런 한편 연기와는 담쌓았지만 인지도나 미모만으로 드라마에 주역을 맡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런 드라마고 영화지만 이들이 연극만으로 견뎌낼 수 없는 생활고를 해결해준 것이라니 아이러니란 이런 것이다. 비록 주인공이 되지 못한 비애는 있었지만 이들의 연기와 존재는 이제 드라마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임은 누구나 인정하는 추세라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벽지의 무늬를 세면서 시간을 보낼 정도로 기나긴 무명의 시간을 보냈던 대학로 출신 배우들의 절실함은 그대로 그들의 연기를 통해 보이는 것이리라.

이즈음의 시대에 순수예술을 논하는 것이 우스워지긴 했지만 그나마 대학로의 배고픔은 견디며 연기내공을 쌓는 이들에게서 순수함을 찾는 것까지는 막을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얼굴이 아닌 연기로 감동을 주는 배우들이 그곳을 통해 배출되고 있으니 대학로는 졸업장 없는 진짜 콘서바토리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안석환, 박철민에게는 또 다른 특별한 점이 있었다. 안석환은 연우무대 출신이고, 박철민은 놀랍게도 극단 현장 출신이었다. 연우무대는 워낙 명배우들을 많이 배출한 극단이기도 하지만 무대에 올리는 작품들이 하나같이 문제작일 정도로 개념을 갖추기로 정평이 난 곳이다. 연우무대가 다소 침착하고 지적인 모습이라면 극단 현장은 때로는 극단이라기보다는 민주투사들의 집합소 같은 느낌이 더 강한 곳이다.

그런 출신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의 성향이 원래 그랬는지는 몰라도 안석환과 박철민에게서 소위 개념 넘치는 생각과 활동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박철민에게서 놀랐던 것은 짧지만 명확한 소신 발언이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요즘 티비에서, 그것도 예능에서 전태일 열사라고 당당히 말하는 배우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라움을 넘어 감동스러웠다.

박철민은 자신의 80년대 극단 현장 생활을 설명하면서, 연예인의 정치참여에 대한 질문에 거침없는 의견을 피력했다. 제도권 정치인 누군가를 당선시키기 위한 참여는 절대 반대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꺼낸 뒤, 대신 절대악 절대선에 대한 참여는 지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박철민은 여기서 절대선으로 70년대 노동환경을 바꾸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린 청계천 피복노조의 전설 전태일을 예로 들었고, 절대악으로는 나쁜 고기가 들어오는 것을 막는 일을 말했다.

박철민이 수입 쇠고기를 언급한 것은 좀 뒤늦은 감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쇠고기 수입으로 우려됐던 광우병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대신 한우농가에서 소를 굶겨 죽여야 하는 비극적 사태를 조장한 것이기에 광우병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는 비극의 원인인 탓이다. 소를 굶겨 죽여야 하는 구조적 사실을 보지 못한 얄팍한 발언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박철민이었다. 그저 웃기는 애드리브나 하는 배우로 알았던 박철민이 180도 달라 보이는 순간이기도 했다.

요즘 코미디는 풍자가 유행이다. 레임덕을 적극 활용해 활로를 찾은 것이긴 하지만 좁아진 코미디의 입지를 넓혀주는 촉매제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런 반면 사정이 좋은 예능은 시대와 벽을 쌓고 있다. 무한도전만이 간헐적으로 시대를 반영하는 명품 풍자로 환호를 받을 뿐이다. 우스갯소리로 현재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프로그램은 뉴스와 예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다. 그러나 박철민의 개념 찬 발언은 예능도 이제 시대에 대해서 할 말을 하겠다는 작은 선언이 아닐까 흥분케 했다. 뉴스가 못하면 예능이라도 하긴 해야 할 테니 말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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