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사극에는 하나의 패턴이 유지되고 있다. 바로 한자를 이용한 수수께끼 내기인데, 최근 모든 사극에서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가깝게는 뿌리깊은 나무의 곤구망기를 떠올릴 수 있고, 이병훈 감독의 동이에서는 글자를 막대기에 감아서 해독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 해를 품은 달도 예외는 아니어서 4회에 드디어 한자 수수께끼가 제출되었다.

대비로부터 연우를 죽이라는 명을 받고 갈등하는 국무 장씨가 본 환상 속에 나온 글자인데, 빨간 댕기 같은 천에 처음에는 이인공(二人工)이라 써졌다가 이내 무(巫)로 변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아주 쉽게 해석하자면 이인공은 무(巫)자를 구성하는 형태소 그대로 풀어놓은 것이다. 그렇지만 그 정도로는 수수께끼가 성립할 수 없어 너무 싱겁다.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데, 이 환상의 힌트는 이미 인물소개에 나와 있다.

연우는 세자빈에 간택되었지만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사가로 나오게 되지만 결국 숨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다시 살아난 연우는 자신의 정체를 기억하지 못한 채 무녀로 살게 된다는 내용이다. 결국 부부의 연을 맺지는 못했지만 연우는 무녀로서 세자를 지켜주는 운명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무 자 하나로도 충부한데 굳이 그것을 파자하여 이인공이라 한 이유는 무엇인지 의문이 남는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속에 대해서 조금 깊이 들어갈 필요가 있다. 제도 종교가 자리잡으면서 무속은 미신이고, 혹세무민하는 사교로 매도되었지만 사실 무속은 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종교이다. 세계종교인 불교조차 한국에 와서는 이 무속과 타협할 정도로 민간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종교이다. 그래서 사찰에 가면 칠성당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이 불교와 한국 전래종교인 무속과의 화해를 입증하는 것이다.

기원으로 찾아가자면 모든 인류는 제정일치시대를 겪었다. 쉽게 말해서 무당이 곧 그 무리의 우두머리였던 것이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열악한 문명 속에서 선사시대 인류는 환경에 지배받을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토템이나 샤먼에 대한 의존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신은 대중에게 직접 계시를 내리지 않으니 누군가 신과 인간 사이의 통역을 맡아야 했으니 그가 바로 무당인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보를 쥔 자가 권력을 갖게 되는 이치와 같다.

무당의 첫 번째 속성은 바로 신의 계시를 듣고, 그것을 인간에게 전해주는 사제의 역할이다. 무(巫)의 공에 해당되는 의미다. 공(工) 자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형상을 띄고 있다. 그리고 이인공의 사람 인 두 개는 무당의 두 번째 속성으로 혼자지만 둘인 운명을 뜻한다. 무당의 일상은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소위 접신이 되는 순간의 무당은 신이 된다. 접신 상태의 무당은 몸과 정신이 신에게 완전히 지배되어 인성은 가려지게 된다.

그런 이중의 삶은 무당을 의미하는 한자 무(巫)를 파자 해석으로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공(工) 안에 사람 인(人)이 둘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무당은 한 사람에게 두 가지 존재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무 장씨에게 오래 전 연우를 부탁했던 아리가 준 해법은 무당을 만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인공이란 글자를 굳이 강조한 것은 단순히 무당으로 살게 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편이 좋다.

접신의 상황이 지나면 무당 역시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연우에게 무녀의 운명과 여전히 일국의 지존인 여자임을 또한 암시하는 것이다. 연우가 가진 비극적 설정으로 인해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고 시청자만 애달픈 상황이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그러다 일정 시점에서 연우가 그 비극의 사연을 알게 되면서 이 드라마의 정서가 최고조에 이를 것이고, 세자의 여자면서도 결코 그 한 사람의 여자로 살아갈 수 없었던 연우의 기구한 운명이 이인공에 담긴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싶다.

간택과 가마솥 뚜껑에 대한 토막 상식

세자빈이나 왕비를 간택할 때 후보는 3간택의 절차를 거친다. 우선 초간택에 선발된 후보들은 궁궐문을 들어설 때 가마솥 뚜껑을 왼발로 밟고 지나게 된다. 이는 민간의 풍습이 궁궐까지 파급된 것을 의미하는데, 간단히 말해서 궁궐의 안살림 즉 내명부로의 진입을 의미하는 행위였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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