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조현옥] 삼림욕장 입구 양옆으로 우거진 무성한 초록 잎새 사이에 누가 물감을 찍어 놓은 듯한 새파란 꽃잎이 눈에 띄었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꽃의 전체 모습이 정확히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파란 잎만 얼핏 보는 순간, 닭의장풀이라는 이름이 마음속에서 떠올랐습니다. 어떻게 그 이름을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학습이란 의식적인 것보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기억에 깊이 새겨지나 봅니다. 이 꽃의 이름처럼 친구의 이름이 마음속에서 들려온 적이 있었습니다.

오래전, 둘째 딸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냥 어떤 사람을 지나쳐 몇 걸음 갔는데 익숙한 느낌에 돌아보는 동시에, 너 천OO? 하고 저도 모르게 친구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건 친구의 이름이 기억이 아닌 마음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어릴 적 친구와 환경은 기억이 아닌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렸을 때 있었던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이 한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기도 하겠지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전학 왔던 그 친구는 목소리가 맑고 낭랑하였습니다. 웅변대회에 나가기 위한 원고를 놓고 제가 함께 연습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여기서 손을 힘껏 쥐고 이 부분은 말을 이렇게 줄이자, 뭐 이런 것을 방과 후에 학교에 남아서 했었네요. 그리고 그 친구의 집에서 테리우스가 나오는 「캔디」라는 만화책을 열 권 정도 읽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 이후 반이 바뀌며 서로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고 멀어졌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같은 반이었던 초등학교 4학년 때보다 서로 몸무게가 30kg 이상 늘어서 만났건만 그냥 지나치며 마음속에서 천OO하고 떠올랐으니, 제 마음은 그 친구에 대한 좋은 느낌이 많았던가 봅니다.

초등학교 시절 갈색 단발머리에 머리가 곱슬곱슬했던 친구는 아줌마가 되어서도 같은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전부터 갈색이었던 머리에 너무 구불거리지 않는 자연스러운 웨이브가 있는 머리 스타일 때문인지 오랜만에 만났어도 친구의 얼굴은 친근해 보였습니다.

알고 보니 그 친구도 저의 둘째 딸과 같은 어린이집에 외동딸을 데려다주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결혼하고 6년 정도 지방에서 살다가 돌아와 고향에서 바로 초등학교 친구를 만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만난 뒤 우리는 동갑내기 딸을 같이 놀게 하고 자주 왕래하며 지냈습니다.

닭의장풀 (사진=조현옥)

마음과 느낌으로 알아본 친구처럼 닭의장풀도 저와 사연이 있었네요. 꽃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꽃잎 주변에 양옆으로 길쭉하게 뻗은 초록색 잎새가 눈에 들어옵니다. 옥수수 잎처럼 나란한 잎맥을 가진 날씬하고 진한 초록 잎. 어머니께서 당뇨가 있는 아버지를 위해 우리 집 옥상에 널어놓던 달개비였네요. 어머니를 따라 빨래터에 가던 길에 있던 논두렁이나 개울가 한편에 피었던 그 파란 꽃입니다.

닭의 볏을 닮아서 닭의장풀이라고 한다는 말이 있는데, 저는 아무리 봐도 닭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큰 꽃잎 두 장이 위쪽에 있고 하얀 잎 하나가 아래쪽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 대신, 하얀 꽃잎 때문에 가늘고 노란 꽃술이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위쪽의 큰 동그란 잎은 여자아이가 두 갈래머리를 올려묶은 것 같고, 흰 꽃잎 위에 노란 수술은 흰 블라우스 위에 노란 리본이 묶여 늘어진 것 같습니다.

닭의장풀의 수술은 여섯 개인데 네 개는 노란 리본의 고리 같고 두 개는 길게 늘어져 끝부분에 노란 술이 있으니 노란 끈을 리본으로 묶어 늘어진 것 같습니다. 달리 보면 보라색이나 파란색 나비와 노란 더듬이로 보아도 될 것 같네요.

닭의장(欌)풀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습니다. 오리 발자국을 닮은 풀 ‘압척초(鴨跖草)’라고도 하는데, 세 갈래의 꽃잎이 오리 발자국을 닮아서 생긴 이름으로 보입니다. 닭의장의 장(欌)은 ‘장롱’이란 뜻이니 닭장 옆에 우거진 풀을 보고 닭장 풀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라는 게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저의 어머니가 불렀던 것처럼 ‘달개비’라고 불리며 당뇨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 외에도 더위로 인한 열병, 고혈압이나 소염, 항암 등의 작용이 있습니다. 봄에 어린 순을 나물로 먹기도 하고 여름의 잎은 말려서 약으로 먹을 수 있습니다. 진한 색의 꽃잎은 말려서 꽃차로 마시고 염료로도 쓰인다니 참 쓸모가 많은 식물입니다.

꽃말은 ‘순간의 즐거움’, ‘그리운 사랑’이라고 합니다. 꽃이 낮에 피었다 지고 하루밖에 살지 못한다니 행복한 순간이 짧고 사랑을 그리워하는 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네요.

닭의장풀 (사진=조현옥)

꽃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며 찬찬히 살펴보니 다른 꽃들은 아무리 작아도 꽃송이가 입체적인데 이 꽃은 꽃잎 석 장이 평면적으로 놓여 얇은 종이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위쪽은 둥글고 아래쪽은 뾰족한 작은 꽃잎 석 장에 여섯 개나 되는 수술과 암술이 아주 작고 가늘게 붙어 있어 앙증맞습니다. 그러니 여러 꽃과 풀이 우거진 곳을 지나치다 보면 이 꽃의 존재감은 아주 약해 보일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자연물은 각자 존재하는 의미와 역할이 있는 거지요. 네이버 블로그 <혁이삼촌의 풀꽃나무 일기>에서 ‘호리꽃등에’가 닭의장풀에서 꿀을 채취하고 수분을 하는 모습이 묘기와 같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날씬한 꿀벌을 닮은 호리꽃등에가 ‘호버링’이라는 제자리 비행 기술을 사용하여 꽃을 탐색하고, 위쪽 수술과 길쭉한 모양의 아래 수술에 교대로 매달리고 몸을 돌려 꿀을 얻는 과정에서 수분이 일어나는 게 다른 꽃에서의 화분에 비해 절묘한 생명의 공식이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호리꽃등에만은 이 작은 꽃의 존재를 확실히 알고 생존을 위한 과정에서 꽃에게 수분이라는 은혜를 돌려주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오늘 연보라색 닭의장풀에서 호리꽃등에가 꿀을 먹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으니 참으로 뿌듯한 일입니다.

강원대학교 유기억 교수의 [야생화 이야기]에 따르면, 중국의 시인 두보는 닭의장풀의 잎이 댓잎을 닮았다며 ‘꽃이 피는 대나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반에 꽂아놓고 가까이할 정도였다니 이 작은 닭의장풀은 시인의 수반에 올라간 들꽃입니다.

닭의장풀, 겨우 세 장뿐인 꽃잎과 아주 작은 꽃술을 가졌지만, 사람과 곤충에게 소중한 꽃입니다. 닭의장풀처럼 작지만 뚜렷한 자기만의 색깔로 세상 한 모퉁이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닭의장풀 (사진=조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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