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김은숙 작가의 <미스터 션샤인>은 조선 말 양반의 핍박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한 소년이 어렵사리 목숨을 부지해 미국 군함에 몸을 싣는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그 소년이 첫발을 내디딘 곳이 바로 '뉴욕'이었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이역의 땅에 도착한 소년은 다행히 은인의 도움을 받아 아메리칸 군인이 될 수 있었다.

조선의 소년이 내디딘 낯선 이국의 항구, 뉴욕은 어떤 곳이었을까? 넷플릭스의 범죄수사 스릴러 시리즈물로 찾아온 <에일리어니스트>를 보면 그 시절 뉴욕을 실감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시리즈는 이제는 역사적 인물이 된 루스벨트를 소환한다.

갓 부임한 경찰청장 루스벨트는 강직하며 새로운 시대의 희망을 믿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부임한 뉴욕 경찰청은 여전히 몽둥이 찜질로 범죄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겁박하고, 부자들의 뒷배를 봐주는 '부정한' 모리배와 같은 경찰들이 포진한 집단에 불과했다.

소년 연쇄살인사건

넷플릭스(Netflix) 오리지널 시리즈 '에일리어니스트(THE ALIENIST)' 시즌1

그런 구태의연한 수사 방식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다리 난간 위에 눈이 파이고 내장이 드러나는 등 잔혹하게 살해된 소년의 시체가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건은 앞서도 발생했던 것인데 경찰 내부 조직은 쉬쉬하고 있었다. 즉 이상심리를 가진 범인에 의한 연쇄살인사건이 등장한 것이다.

<에일리어니스트>는 우리나라에는 <이스트 사이드의 남자>로 번역된 칼렙 카(Caleb Carr)의 장편소설을 시리즈화 한 것이다. 원작의 주인공은 무어라는 기자로, 뉴욕 경찰청장과 정신과 의사인 친구와 함께 사건 해결에 뛰어든다. 하지만 <에일리어니스트>라는 다른 이름을 가진 시리즈로 돌아온 첫 번째 시즌은 당시 뉴욕에서는 '마술사' 정도로 취급받던 정신과 의사인 '에일리어니스트' 크라이슬러 박사를 중심으로 풀어낸다.

<켑틴 아메리카 시빌워> <킹스맨>의 다니엘 브륄이 분한 크라이슬러 박사는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이 인간의 본성을 잃은 것처럼 대우받던 시절 발생한 소년의 연쇄살인사건을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또한 크라이슬러 박사는 사건을 보다 과학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사건 현장을 친구이자 뉴욕 타임스 기자인 존 무어(루크 에반스 분)에게 삽화로 그릴 것을 요구하는 한편, 루스벨트 국장의 비서이자 경찰국의 유일한 여성인, 그리고 그 누구보다 냉철하게 사건을 바라보고 사건과 관련된 경찰청 서류에 접근할 수 있는 사라(다코타 패닝 분)를 수사의 동료로 받아들인다. 또한 지문이나 검시 등 과학적 증거에 관심을 기울이는 유대인 출신의 두 형제 수사관도 함께한다.

트라우마에 천착한 에일리어니스트

넷플릭스(Netflix) 오리지널 시리즈 '에일리어니스트(THE ALIENIST)' 시즌1

드라마는 당시 뉴욕이라는 현실에서는 '아웃사이더'에 속하는 인물들- 정신과 의사, 여성, 유대인을 전면에 내세워 당시의 '권위'였던 경찰 권력의 수사방식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이제 우리에게는 범죄 수사라면 당연하게 여겨지는 프로파일러, 현장 검증, 지문 대조 등의 과학적 수사 방식이지만, 여성에게 참정권조차 허용되지 않은 시대에 이들의 수사 방식은 그저 한낱 도발적인 음모처럼 보일 뿐이다.

연쇄살인의 희생자는 소년이다. 그리고 그들은 '남창'이다. <미스터 션샤인>의 한국 소년은 '은인'의 도움을 받아 미합중국의 군인이 되었지만, 뉴욕 뒷골목의 갈 곳 없는 소년들은 자신의 몸이 곧 생존 수단이 되었고 따뜻하게 다가온 그 누군가는 그들의 목숨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이 사건을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크라이슬러 박사는 왜 범인이 굳이 소년을 그토록 잔혹한 방식으로 살해할 수밖에 없었을까란 문제에 천착한다. 그러한 천착의 끝에 마주한 것은 박사 자신도 시달리고 있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이다. 범인인 듯한 인물을 데려다 몽둥이 찜질을 해서 범죄를 실토하게 만들던 당시로선 획기적이다 못해 자학적이기까지 한 크라이슬러 박사의 접근 방식은 당연히 당시 수사 일선의 경찰들과 적대적인 상황을 만든다.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트라우마에 파고드는 방식은 함께하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갈등을 일으킨다.

<에일리어니스트> 시즌1은 시리즈의 서막답게 등장인물 저마다가 가진 깊은 트라우마를 연쇄살인사건 수사를 통해 풀어낸다. 그저 부유한 동성애자에 의한 잔혹한 장난인가 싶었던 사건은 그걸 파헤치자 신체적 결함으로 인해 자신의 육친에게 외면당한, 상처받은 한 인간을 마주하게 된다. 19세기 미국, 백인 남성으로 대변되는 시대적 상징 속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병든 이들은 그 상흔을 범죄로 드러내게 된 것이다.

넷플릭스(Netflix) 오리지널 시리즈 '에일리어니스트(THE ALIENIST)' 시즌1

그런데 범인의 트라우마는 곧 크라이슬러 박사 자신의 트라우마이며, 사라, 존 무어도 자유롭지 않다. 어린 시절 자상하지만 과도하게 근엄했던 아버지로 인해 한쪽 팔의 성장이 멈춰버린 크라이슬러 박사, 우울증에 걸린 아버지의 자살을 목도했던 사라 그리고 성실하지 못한 아버지와 척을 졌던 존 무어 등 저마다의 트라우마가 드러나게 된다. 20세기를 앞둔 미국의 번영 시대, 하지만 그 시대는 일부 사람들만의 넘치는 부처럼 극소수의 몫이었다.

미성숙한 팔을 숨기듯 자신의 어린 날 상처를 숨겨왔던 크라이슬러 박사, 사람들과의 거리를 좀처럼 좁히지 못하는 사라, 알코올에 의존하는 존 무어 등 주인공들은 수사를 통해 어린 날의 상흔이 잔인한 연쇄살인의 빌미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동시에 과연 자기 자신들과 범죄자와의 차이점이 무엇일까란 '정신의학적' 고민에 봉착하게 된다.

아직 여성들이 코르셋으로 몸을 옥죄어야 하는 시대, 한편에서는 귀족과도 같은 부유한 이들의 성찬이 벌어지지만 그 맞은편 거리에서는 갈 곳 없는 아이들이 몸을 팔아야 하는 시대, 정신병자는 그저 수용되는 시대, 과학과 함께 개인의 권리가 싹트기 시작한 시대, 20세기를 앞둔 미국의 민낯이 <에일리어니스트>를 통해 실감 나게 그려진다.

범죄 수사로 온 19세기의 정신의학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에일리어니스트> 시즌1은 연쇄살인사건을 통해 인간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원가족의 트라우마란 문제로 출발한다. 그리고 사건의 해결과 더불어 주인공들은 저마다 그 트라우마에서 한 걸음 나서게 된다. 사건의 해결은 곧 주인공들이 오랫동안 짊어져 왔던 가족 문제에 대한 해소가 되는 것이다. 크라이슬러도 사라도 존 무어도 모두 자신의 상처에 의연하게 마주 설 수 있게 된 것, 당당한 개인으로 시대를 마주하는 것 <에일리어니스트> 시즌1의 결론이다.

☞ 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미디어스’를 만나보세요~ 구독하기 클릭!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