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나무 결말은 광화문 잔혹사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뿌리깊은 나무의 대단원은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심정적으로 뭔가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이 정도면 성공적으로 매듭지었다고 본다. 보는 시각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겠지만 주관적 견해로 뿌리깊은 나무 결말의 주제는 ‘백성’이다. 그것도 고통으로 책임지는 백성이다. 고통 중에서도 최상인 죽음으로 책임진 백성이다.
그리고 작가는 역사에 대해서 정성껏 예의를 차렸다. 허구의 인물들을 모두 죽음으로 지워냈다. 소이도 살릴 수 있었고, 채윤도 살릴 수 있었겠지만 작가는 그들 모두에게 죽음이란 긴 휴식을 선사했다. 잔인해서가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 이 드라마 속 사람들이 허구의 인물임을 분명케 하려는 것 같다. 그 결심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역사는 그 후로도 줄곧 백성에게 잔인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채윤, 소이 등의 죽음은 그래서 수긍할 수 있다.
무휼과 채윤의 죽음 그리고 반포식의 커다란 사건들 속에서 눈길을 끌지 못했지만 흩날린 해례를 손에서 손으로 전달해서 모으는 백성들 모습은 정기준이 말한 것처럼 ‘말을 알아듣는 개새끼’의 모습이 아니었다. 기득권자의 역사 속에서 짓밟히고, 수탈당하면서도 견뎌낸 질긴 나라의 뿌리로서의 모습이었다. 처음 소이와 궁녀들이 나와 아이들과 한글노래를 부르며 저자를 돌던 그 장면과 연결되는 뭉클한 장면이었다.
꽃이 바람에 꽃잎을 하나씩 덜어내듯이 속치마를 벗어 그것을 종이 대신하여 쓴 해례본은 순결과 헌신을 상징하였다. 독이 퍼져가는 극한의 고통에도 소이는 겉옷을 곱게 개어 놓았다. 그만큼 해례본을 적는 그녀의 마음이 정갈하고 종교같이 엄숙한 행위였음을 연출로 보여준 것이다. 그렇게 삶의 마지막 숨을 불어넣은 해례본에 소이는 아무런 표식도 남기지 않았다. 역사의 주인이면서도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던 그 많았던 백성들의 이름들처럼.
소이가 삶의 마지막 기운을 짜내어 해례본을 쓴 것처럼, 채윤도 이미 북망산을 넘었을 혼을 붙들어 세종의 반포식을 지켜보았다. 자신이 아니라 소이를 대신해서 한글이 반포되는 그 장면을 서서 지켰다. 소이와 채윤은 조금은 다른 곳에서, 다른 때에 죽었지만 그렇게 해서 함께 동행할 수 있었다.
“그들은 결국은 그들의 지혜로 길을 모색할 것이다. 매번 싸우고 웃어넘길 것이다. 이기기도 하고 속기도 하고 질 수도 있다. 지더라도 괜찮다. 그게 역사니까” “ 우리 글로 욕도 하고 놀기도 한다. 이제 글자는 세상의 것이고 저들의 것이다. 그 글자가 어떤 세상을 만드는지도 저들의 결정이다” 밀본도 아니고, 사대부도 아닌 현재의 우리에게 남긴 세종의 유언이 아닐까? 대의를 지키기 위해 죽어간 모두를 대신한 역사의 혼이 담긴 유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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