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욱의 빛과 그림자는 천일의 약속과 브레인의 기세에 눌려 아직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다. 순양이라는 가상 도시의 최고 부자였던 안재욱 부친이 지역 국회의원의 계략에 말려 쫄딱 망하는 스토리와 향후 안재욱이 복수의 칼날을 벼르게 될 쇼단의 스토리 접목이 생각처럼 큰 흡인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70년대 중앙정보부에서 조작해낸 숱한 간첩과 좌익 사건들을 간명하게 풀어내 요즘 사회분위기라면 공감대가 커질 만도 하지만 결국 수애와 신하균의 화제성을 당해내질 못했다.

그러나 50부작인 이 드라마를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이제 불과 7회가 방영됐을 뿐이고 작년 동이가 그랬듯이 초반의 부진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장철환(전광렬), 조명국(이종원), 차수혁(이필모) 등에게 당했던 강기태(안재욱)가 서서히 반전을 도모하는 상황이 빠르게 전개되고 있어 관심을 끌 것 같다.

물론 아직은 정권의 실세로 승승장구 중인 장철환 일당은 무사하다. 강기태의 엄마 박원숙이 전당포를 들락거리며 겨우 버티는 중에 심상찮은 변화들이 연예계에 싹트고 있고, 그것들은 절묘하게 안재욱을 향하고 있다. 우선 안재욱에게 큰 빚을 진 양태성(김희원)이 월남전에 가서 밀거래로 엄청난 거부가 돼서 돌아왔고, 세븐스타 쇼단의 최고 스타 유채영(손담비)이 단장과 갈등을 빚는 상황에서 강기태에게 쇼 비즈니스를 부추기고 있다.

게다가 자기 부친의 죽음과 집안 몰락 뒤에 숨겨진 장철환의 음모를 전혀 몰랐던 강기태가 의심을 품게 된 것도 큰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부친의 조촐한 제사를 모시기 위해 순양에 내려간 강기태는 단골 요정에 갔다가 거기서 조명국이 과거 신단장(성지루)를 납치했던 지역 깡패과 심각한 표정으로 만나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일단 음모에 대해 확신하지 않지만 조명국을 대하는 다른 시선을 갖게 된 것은 분명하다.

조명국이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장철환을 만나기 위함이었고, 장철환은 조명국에게 영화 쪽 사업을 맡으라 한다. 연예계 자금을 긁어모아 정치 자금화하려는 것이다. 빛과 그림자가 단순한 복수와 성공 혹은 70년 추억만을 추종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껏 잘 다뤄지지 않았던 정치와 연예계의 검은 커넥션을 건드리고 있다. 이정혜(남상미)가 궁정동 여인으로 출근하게 되는 장면에서 그 첫 번째 단추를 꿰기 시작했다.

정치라는 것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80년 궁정동 사건을 통해 드러난 연예계의 어두운 모습은 크게 밝혀지지 않았다. 어쨌든 대통령이 저격당하는 어마어마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후 또 다른 군부독재의 출현으로 인해 궁정동의 정서는 그대로 승계되었다. 빛과 그림자가 그 어두운 거래를 얼마나 리얼하게 폭로할지는 더 두고 봐야겠지만 드라마에서 시도하기 쉽지 않은 면들을 건드리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흥미롭기만 하다.

거기다 빛과 그림자는 스토리와 연기 외에도 볼거리가 쏠쏠하다. 우선 국도극장을 중심으로 한 야외세트가 너무도 실감난다. 실제 거리 풍경을 자주 잡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보조출연자들의 의상 디테일 하나하나를 보는 재미가 아주 크다. 벽에 붙은 낡은 벽보하며 오크통형 맥주잔까지, 정확히 70년대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제작진이 아주 작은 소품까지도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관심을 갖고 본다면 가끔씩 등장하는 거리풍경은 가장 큰 볼거리이다. 특히 7회 엔딩을 장식한 강기태와 신정구의 추격신은 영화 친구를 연상케 할 정도로 아주 멋진 연출이었다.

본의 아니게 강기태에게 사기를 친 셈인 신정구는 강기태를 보자 다짜고짜 도망치기 시작했다. 다소 코믹한 장면인 것이 분명했고 그런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악이 깔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배경음악에 뭔가 잡음이 생기나 싶더니 한동안 두 가지 음악이 뒤엉키는 상황이 됐다. 방송사고가 분명했다 싶더니 몇 초 후 장면에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다. 그 추격전이 시작하자마자 거리에는 애국가가 울려 퍼진 것이다. 요즘은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감독은 이 코믹한 상황을 배경음악과 실제 음악을 교묘하게 오버랩시켜서 당황스럽지만 알고 나서는 웃음 짓게 만들었다. 도망치는 신정구는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계속 달렸지만 그만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강기태로서는 더 이상 쫓을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붙잡힌 신정구가 황당한 표정으로 강기태를 돌아보고, 태극기를 돌아볼 때 다시 드라마 OST가 흘러나와 짧지만 인상적인 추격전을 마감했다. 애국이 강요당하던 시대를 은유한 아주 훌륭한 코미디였다. 연출의 힘을 느끼게 한 명장면이었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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