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즌 포항 스틸야드 서포터석에는 경기가 열릴 때마다 항상 보였던 걸개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ULTRAS'라는 이름 위에 한 인물의 얼굴이 프린팅돼 있는 것입니다.

그 얼굴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포항 스틸러스를 만든 사람,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입니다. 박 회장은 포항 축구의 대부이자 상징적인 인물로 포항 스틸러스의 역사와 함께하고, 발전을 이끌어왔습니다. 포항 스틸러스가 명문팀으로 도약하는 데는 박 회장의 남다른 애착과 관심,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포항을 지지하는 많은 팬들은 박 회장에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랬던 박태준 명예회장이 13일 오후, 지병인 폐질환 악화로 향년 84세를 일기로 타계했습니다. 박 회장의 별세 소식에 포항 스틸러스는 곧바로 홈페이지에 소식을 전했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팝업창을 띄워 고인의 넋을 기렸습니다. 포항 축구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한국 프로 축구에도 지대한 관심과 사랑을 보냈던 큰 인물이 작별을 고했습니다.

▲ 사진=포항 스틸러스 홈페이지
'명문' 포항제철 축구팀을 만든 전설

소설가 조정래는 2007년 펴낸 박태준 전기에서 박 회장에 대해 '뜨겁게 격동기를 살아온 일꾼'이라고 칭송했습니다. 그만큼 박 회장은 어려운 시기에 무에서 유를 창조해냈고, 그 성과는 지금도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그토록 애착을 가졌던 축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실업축구팀은 바로 그의 손에서 비롯됐습니다. 이미 박 회장은 1964년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된 뒤, 당대 최고의 축구선수들을 모아 특급 대우를 해주고 축구팀을 운영, 지원했습니다. 그러다 포항제철 사장직에 오르고 1973년 6월, 포항제철이 힘찬 가동을 시작하면서 곧바로 포항제철 축구팀을 창단,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3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포항제철은 포항 아톰스, 포항 스틸러스로 변화하면서 당대 최고의 팀으로 떠올랐습니다.

박 회장이 남긴 최고의 선물, 스틸야드

포항 스틸러스가 명문팀으로 떠오르는 데 주춧돌 역할을 해낸 그였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성과는 우리나라 최초 전용 구장, 포항 스틸야드를 만든 것입니다. 당시 변변한 축구 전용 구장이 없는 현실을 크게 안타까워한 박 회장은 1988년 말, 공사를 지시했고 2년여 만인 1990년 11월 2만여 석 규모의 축구 전용 경기장을 준공해 한국 축구의 새 역사를 썼습니다. 탁 트인 공간, 특징적인 구조물들, 푸른 잔디까지 모든 시설물들이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지어지고 갖춰졌습니다. 이 전용 구장이 한국 축구, 프로 축구의 발전을 몇 년 앞당기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 사진=포항 스틸러스 홈페이지
이 스틸야드 덕에 2002년 월드컵을 유치하는 데 '작은 공'을 세운 일화도 유명합니다. 월드컵 조직위원회 방문단의 한국 실사 당시, 포항 스틸야드를 두고 방문단원은 “지방 소도시에 축구전용구장이 있을 정도면 유치능력은 검증받은 것이다”고 언급하며 스틸야드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스틸야드 건립 몇 년 전까지 '월드컵 본선에 나가는 나라가 전용 구장 하나 없다'고 비아냥거렸던 해외의 시선을 보기 좋게 잠재우는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스틸야드였습니다. 스틸야드가 만들어진 뒤에는 또 다른 제철소를 만든 전남 광양에도 전용 구장을 건립해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박 회장이 축구계에 남긴 성과는 다양했습니다. 1984년에 K리그 최초로 외국인 선수를 도입했던 것을 비롯해 유소년 축구 시스템 구축, 선수들을 위한 클럽하우스 건립 등도 그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줘서 이뤄낸 것들이었습니다. 지금도 몇몇 팀들이 이 같은 환경을 제대로 입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10-20년 전에 이 같은 발상을 했다는 것 자체가 가히 '혁명적인 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자신이 경영하는 기업의 팀을 키우는 차원이었다 할지라도 클럽 축구, 프로 축구의 선진화에 앞장선 그의 공로는 위대했습니다.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축구, 팬들도 '박태준!'을 연호했다

정치계 본격 입문, 은퇴 후에도 박 회장의 축구 사랑은 이어졌습니다. 국회의원 시절에는 2002년 월드컵 추진 국회의원연맹 회장을 지내 월드컵 성공 개최에 힘을 보탰고, 정계 은퇴 후 2007년 포항 스틸러스가 15년 만에 K리그 우승을 차지했을 때는 축하 화환을 보내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2008년에는 축구협회가 박 회장의 한국 축구에 대한 공을 인정하고 창립 75주년 기념 공로상을 수여했습니다.

그리고 불과 7개월 전인 지난 5월 15일, 스틸야드를 찾아 자신이 만든 팀을 열렬히 응원하며 건재를 과시했습니다. 박 회장의 등장에 포항 선수들은 끝까지 악착같은 플레이를 펼쳤고 결국 전북 현대에 3-2 대역전승을 거두며 지켜봤던 박 회장에 승리를 바쳤습니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지켜본 박 회장은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일어서서 박수를 치며 화답했고, 그런 박 회장에게 팬들은 '박태준!'을 연호했습니다. 1990년 건립 이후 처음 스틸야드를 찾은 '창립자'에 팬들은 예우를 다했고, 그 '창립자' 역시 화답하며 훈훈한 장면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게 박 회장은 자신이 좋아했던 축구와 마지막까지 함께하려 했습니다.

▲ 지난 5월 15일, K리그 경기에 앞서 포항 선수들을 격려하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사진: 포항 스틸러스)
남들이 생각하지 않은 것을 시도하고 아낌없는 지원을 하며 클럽 축구 발전의 토대를 만든 박태준 명예회장. 이제는 고인이 됐지만 한국 축구에 열정을 바쳤던 다양한 노력들, 모습만큼은 오랫동안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지 몰라도 축구계에서 낸 성과는 가히 혁명적이고 진취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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