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한국에 힙합이 도착한 건 언제일까? 최초의 한국 힙합 트랙은 1989년에 나온 홍서범의 '김삿갓'이라 보는 견해가 주류지만, 한국 힙합이라 부를 만한 실체가 형성된 건 훨씬 이후이며 그 시작이라고 책갈피를 끼울 페이지를 고르기 쉽지 않다. 다만 랩뮤직이 대중적으로 사회를 타격한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가 나온 1992년일 것 같다. 이역만리 땅의 고교생이던 타이거 JK의 힙합은 이때부터 시작된 상태였다.

JK는 어린 시절 음악평론가였던 아버지 서병후 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리고 LA 베버리 힐즈 하이스쿨에 다니던 90년대 초반에 전설적 힙합 그룹 N.W.A를 듣고 힙합에 빠졌다(유튜브 채널 '조승연의 탐구생활', '타이거 JK와 한국 힙합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2020). 또래 친구들이 입는 옷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자신들이 뱉는 비속어를 뱉으며 랩을 하는 모습이 날 것의 충격으로 꿰뚫고 갔다고 한다. 그리고 JK는 미국 사회에서 동양인에게 씌워진 편견, 스테레오 타입의 이미지를 벗고 싶은 반발 심리로 힙합에 투신했다. 힙합 패션을 입고 프리스타일 랩 배틀을 하면서 LA 언더그라운드 래퍼들을 만났고 힙합이란 문화에 참여하게 됐다.

이때 JK의 삶에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는 자신을 힙합에 빠트린 N.W.A 멤버였던 래퍼 아이스 큐브가 'Black Korea'란 노래로 재미 한국인을 비하하자 학교 과제였던 논문 대신 'Black Korea'를 반박하는 랩을 써서 상을 받은 일이다(힙합 웹진 '리드머', '드렁큰 타이거, 그 진실과 오해', 2006). 이 일이 지역 사회에서 소문이 났고, 92년 LA 시민 난동이 일어났을 때 ‘Roots Of Rap'이라는 힙합 행사에 초대되었다. 아마도 이런저런 소문이 한국까지 닿아서 인기 토크쇼였던 '자니윤 쇼'에 출연한 것 같다. 미국 현지에서 인터뷰를 딴 영상에서, JK는 힙합 바지를 입고 드레드 머리를 땋은 채 'call me tiger'라고 랩을 뱉었다.

경계에 선 이방인

'싸이 흠뻑쇼 서머 스웨그 2018'(SUMMER SWAG 2018)에서 가수 타이거 JK가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96년도 MBC에선 드라마 <1.5>가 방영됐다. 90년대엔 세계화의 기류를 타고 미국 교포 자녀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발전한 고국으로 돌아오는 '역이민'이 사회적 현상이었다. 70년대 초반 한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도미한 재미교포 1.5세들이다. 이들의 귀환은 특히 가요 프로그램에서 눈에 띄었다. 솔리드와 박정현, 업타운, 바비킴은 물론 양준일이 그런 케이스다. 이들은 한국에서 듣기 힘든 빌보드 음악과 블랙 뮤직을 접하며 자랐고, 서구적 마인드와 행동 양식을 체화한 이질적 존재였다.

1.5는 1과 2 사이 경계를 긋는 숫자다. 타이거 JK와 힙합의 동행 또한 경계선을 따라간 여정이었다. 블랙 뮤직은 미국 사회에서 억압받는 흑인들의 음악이었고, JK는 흑인과 같은 소수 인종이지만 흑인 무리 밖에 있는 동양인이었다. 한편으론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그 어느 집단에도 완전하게 속하지 못하는 경계에 선 채 고국을 바라봤다.

JK는 <자니윤 쇼> 출연을 통해 기회가 닿아 한국에 돌아갔고, 95년도에 'Enter the Tiger'란 앨범을 낸다. 95년 7월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웨스트 코스트 힙합을 국내에 소개한 '컴백홈'을 발표하기 석 달 전이었고, 김진표가 최초의 한국말 랩 앨범 '열외'를 발표하기 2년 전이었다. 93년도에 나온 우탱 클랜의 앨범 'Enter the Wu-Tang'의 이름을 따온 듯한 JK의 앨범은 모든 트랙이 베이스가 둥둥거리고 스네어가 쾅쾅거리는 붐뱁 비트였고 거의 모든 가사가 영어 랩으로 써져 있었다. 게다가 미국에서 함께 힙합을 하던 흑인, 백인 동료와 팀을 만들어 넘어왔는데, 2021년 한국에서조차 이런 가수가 인기를 얻을 거라 상상할 수는 없다.

JK의 옷깃을 더욱 냉담하게 파고든 건 고국에서 겪은 또 다른 버전의 차별이었다. 음반, 방송 관계자들은 JK의 친구를 면전에서 '깜둥이'라고 모욕했으며, 난생처음 대하는 물건을 보듯 'Enter the Tiger'를 혹평했다(MBC <무릎팍도사> 타이거 JK 편, 2010). 이 일은 JK에게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동방예의지국이라 전해 듣던 아버지의 나라는 품에 안긴 자신을 거절했으며, 힙합이 유행한다던 그곳엔 힙합이 없었다. 어쩌면 어린 JK가 희미한 기억으로 떠올리던 한국은 '태권도' '호랑이' 같은 민족적 아이콘으로 동질성을 상상해 온 미화된 대상, 서구 세계에 사는 한국인이 품게 된 오리엔탈리즘으로 바라본 나라였을지 모른다. 그곳에서 JK는 저질 문화에 빠진 불량아, 꼬부라진 혀로 한국말을 더듬는 교포 1.5세였다. 그는 한국에서도 이방인이었다.

존재 양식으로 재현한 힙합 문화

MBC <황금어장 무릎팍도사> 타이거 JK 편

힙합을 향해 발을 뗀 JK의 여정은 미국 교포로서의 특수한 경험과 영웅담 같은 이야기, 곡절 많은 사연이 뒤섞여 사적 역사를 이룬다. 한국에서 힙합이 다른 무언가의 모습으로 싹을 틔우던 때에 그는 이미 힙합에 투신한 상태로 미국과 한국을 오갔다. 그것은 LA 시민 난동 같은 공적 역사와 교차하는 스케일이 있었고 자신의 회고를 증빙해 줄 수 있는 기록물을 남겼다. JK는 한국에서 힙합이 도래하기도 전에 힙합을 한, ‘힙합 이전의 힙합’이란 전사(前史)를 가진 래퍼다. 비록 힙합을 대중화하는 데 일조한 행보는 99년 드렁큰 타이거 1집을 발표한 이후에 펼쳐지지만, 한국 힙합 장르사에서 JK만의 독보성을 찾자면 이 전사를 더듬어야만 한다.

90년대 후반은 ‘Enter the Tiger’가 나온 95년보다 한국에서 힙합이 더 많이 소개되고 인기를 끈 시기다. 하지만 동시기 데뷔한 힙합 뮤지션들에 비해서도 드렁큰 타이거는 리얼한 느낌이 강렬했다. 한국말 랩이 아직 원시적이었던 시대에 영어를 섞은 속사포 래핑은 듣는 이들 귀를 홀렸고, 미국에서 쌓은 이력은 풍문처럼 떠돌며 아우라를 더해주었다. 그는 미국 힙합이 여전히 암중모색으로 소개되던 시절, 바다 건너에서 ‘진짜 힙합’을 겪고 온 이방인이었다. 그렇기에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는 도발적 질문을 데뷔곡 제목으로 취할 수 있었고 힙합을 알리는 전도사처럼 활동했다. 백 퍼센트 힙합 사운드를 깔고 오직 랩으로 승부하는 장르 뮤지션, 힙합 스페셜리스트로서의 래퍼를 대중에게 보여주고 가요계에 등재시킨 것, 이것이 드렁큰 타이거가 남긴 업적이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부분은 음악적인 것 이상에 있다. 그가 힙합이란 문화를 총체적으로 체험하고 몸과 마음에 익힌 래퍼라는 사실이다. 힙합은 음악적 측면은 물론 라이프 스타일과 패션 스타일, 애티튜드, 흑인 커뮤니티 문화 등 다양한 층위의 문화적 요소로 구성된다. 한국처럼 아무런 힙합의 인프라가 없었고 미국과 환경이 다른 사회에서 이 모든 요소를 재현하는 건 불가능하다. 때문에 힙합은 가요계에선 음악과 패션의 일부 요소만 불완전하게 수입됐고, 언더그라운드 신의 모태가 된 PC통신 동호회에선 해외 힙합잡지 기사와 음악 CD를 통해 체험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타이거 JK는 힙합의 문화의 원형이 있는 환경에서 힙합을 ‘살았다’. JK와 같은 시기에 한국에 돌아온 교포 출신 래퍼는 많다. 하지만 그들 중 누가 아이스 큐브에 맞서 디스 랩을 썼다는 무용담을 걸치고 있으며, 알케미스트(미국 유명 힙합 프로듀서)와 동창 친구이고 카파도나(미국 힙합 그룹 우탱 클랜 멤버)와 친분이 있다고 담담한 어조로 회고할 수 있을까. JK만큼 웅장하고 굴곡 많은 ‘전사’를 가진 래퍼가 없는 것이다.

주먹을 내밀며 힙합 악수를 권하고, 말끝마다 “유남생?”(You know what I'm saying?)을 붙이며 랩을 하듯 말해도 어색하지 않은 래퍼, 혹은 그게 신기해 보이지만 멋있는 래퍼. 언젠가 힙합 커뮤니티 ‘힙합 플레이야’의 김현호란 유저가 지적한 것처럼 타이거 JK는 “힙합처럼 말하고 힙합처럼 인사하고 힙합처럼 행동하는” 한국 최초의 힙합 주의자였다. 카메라에 담기는 제스처, 말투 하나하나가 리듬에 절어 있었고, 가요 방송에서 힙합적 양식의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정착시켰다. 백댄서의 존재감을 최소화한 채, 자유로운 동선으로 활보하며 랩을 뱉고 관중과 마이크 패스 놀이를 한다. 마이크 한 자루로 군중을 선동하는 MC의 어떤 뜻풀이, Move The Crowd 자체다. 이건 기존 가요 방송에 없던 방식의 무대이기에 관계자들과의 마찰이 뒤따랐다고 한다. 그렇게 길을 닦는 과정이 있었기에 드렁큰 타이거 이후에 활동한 래퍼들은 좀 더 수월하게 힙합다운 무대를 공중파에서 보여줬을 것 같다.

타이거 JK는 힙합 문화의 관념을 제 존재 양식으로 재현하고 전시한 래퍼다. 속칭 오버그라운드라 불리는 상업 가요계 한편에서 힙합의 대명사로 존재하며 20년이 넘는 세월을 버텼다. 이로써 힙합 아티스트의 이미지가 생생하게 보존된 채 유통될 수 있었고, 많은 이들이 JK를 통해 힙합이란 문화의 원형에 접속하는 느낌을 얻었다. 드렁큰 타이거는 데뷔 이후 다이나믹 듀오, 션이슬로우, 도끼 같은 음악적 친우들과 ‘무브먼트’ 크루를 결성했다. 힙합이 아직 주류에 이르지 못한 시대에, 쟁쟁한 래퍼들이 대가족을 이루며 말로만 듣던 크루 문화로 어울리는 건 장관이었다. 많은 사람이 무브먼트를 통해 힙합에 빠졌고 그들과 힙합 문화를 공유한다는 유대감을 얻었다. 그건 마치 무브먼트 래퍼들과 함께 해방구 같은 공동체를 이루며 이 사회 안에 힙합이란 작은 나라를 세우는 느낌, 힙합 네이션의 시민이 된 듯한 소속감은 아니었을까. 다이나믹 듀오의 최자가 드렁큰 타이거와 처음 만난 순간을 떠올리면서 한 이야기처럼 말이다. 이전까지는 이상한 차림새로 사람들에게 눈총을 사는 존재에 불과했지만, 힙합 악수를 건네는 무리들과 함께 걸어가며 비로소 힙합을 하는 사람이 된 것처럼 떳떳한 기분에 들떴다고(유튜브 채널 와이퍼,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다듀와 타이거 JK 첫만남.ssul 무브먼트 탄생 비화!?. 2019).

한국 힙합의 파이오니어

드렁큰타이거의 타이거JK가 마지막 앨범이자 정규 10집 'X : Rebirth of Tiger JK' 발매기념 음악감상회에서 열창하고 있다. Ⓒ연합뉴스

타이거 JK는 많은 한국 래퍼들과 정반대 자리에서 힙합을 향해 걸어갔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래퍼들은 미디어를 통해 힙합의 단편만을 접하는 괴리감에 처했다. 이 이질적 문화를 한국에 어떻게 뿌리내리게 할지 고민하거나, 그 괴리를 극복하고 더욱더 미국 힙합을 닮은 음악을 만들기를 갈망했다. 반면 JK는 미국에서 힙합과 함께 자란 후 한국에 돌아왔다. 그 앞에 놓인 장벽은 한국 문화를 모르는 교포 래퍼라는 경계선이었으며 더욱더 한국인다운 힙합을 하고 싶어 했다. 그런 것들을 추구하며 자신의 뿌리를 찾고 싶었던 것 같다. 뽕짝 음악을 샘플링한 비트, 갈수록 걸걸해진 플로우, 가사에 등장한 '김치', '한국인의 피와 눈물' 같은 단어, 도가도 비상도 같은 노자 철학의 개념은 한국인 되기의 흔적이자 'call me tiger'에 등장한 단어 '태권도'의 연장선에 있다.

백인과 흑인 사이, 미국인과 한국인 사이 경계를 맴돌던 그는 '토종 래퍼'와 '교포 래퍼'의 경계에 처했다. 또한 대중가요와 장르 음악의 경계가 있었고, 상업 가요계와 언더 힙합 신 어느 곳에서도 온전히 환대받지 못했다. JK는 “힙합은 사는 방법” “너도 힙합, 나도 힙합”처럼 힙합의 정의를 추상화해서 그 외연을 거의 지우듯이 넓히는 말을 자주 뱉었다. 어쩌면 늘 경계 바깥에 있던 사람으로서 그어진 선을 지우고 타인들과 함께 뿌리내릴 수 있는 터전을 갖고 싶은 바람이었던 것일까. 분명한 건 그런 족적을 통해 JK는 새로운 문물이 밀려 들어오던 사회적 과도기에 한 문화의 파이오니어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스마트폰 세상에선 90년대의 힙합처럼 사회에 충격을 가하는 문화적 양식이 뒤늦게 수입될 수가 없다. 외래문화는 네트워크를 타고 퍼져나갈 따름이지, 한 인물이 문익점처럼 문화를 전래하며 대표성을 얻는 일도 생기기 힘들다. 오히려 지금 한국 힙합 신에선 문화적 경계에 대한 자각 없이 미국 힙합의 동향이 곧장 재생산되거나 아주 일상적인 레벨에서 힙합이 재현되고 있다. 타이거 JK는 어떤 의미에선 해외 교류가 제한적이던 시대에 등장했기 때문에 한국 힙합의 파이오니어가 된 인물이다.

JK보다 앞서서, JK와는 다른 위치에서 한국 힙합이 출범하는 데 공헌한 사람도 많기 때문에 파이오니어는 사실 과장된 평판이다. 하지만 숱한 한국 래퍼 1세대 중 그가 파이오니어, 살아있는 전설로 통하게 된 건 그 오랜 시간 동안 기권하지 않은 채 장렬한 존재감으로 힙합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30년 전, 나를 호랑이라고 부르라며 라임을 뱉던 소년은 쉰 살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힙합처럼 말하고 힙합처럼 인사하고 힙합처럼 행동하는” 현역 래퍼로 서 있다. 한국 힙합은 미국 힙합 신에 비해 역사가 짧고 아직도 애들 듣는 음악 취급을 받곤 한다. JK가 한국의 스눕독, 제이지, 나스가 되어 준다면 존재 자체로 신의 역사에 무게감을 더하고 래퍼들의 활동 정년을 넓혀 주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짝패가 떠난 후 홀로서기를 하고, 척수염에 걸려 병마가 덮치고, 소속사에서 일어난 사연 많은 일로 오랜 공백 기간을 가졌어도, 술 취한 호랑이는 "죽지 않는 영혼"으로 부활했다. 힙합이 더 이상 가난과 철학이 아닌 부와 성공을 표상하는 시대가 왔다. 가요계에 몸담은 이래 만년까지 불우한 일들을 겪은 그에게도 더 많은 풍요와 안정이 뒤따르기를 바란다. 그 역시 후배들에게 래퍼란 직업으로 오래도록 먹고살 수 있겠다는 전망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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