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칼럼] ‘이준석 현상’은 희망인가 파국의 예고인가? 언론의 시선은 둘 사이를 오가고 있다. 하지만 간단한 문제다. 첫째, ‘변화’는 확실하다. 가령 이 ‘변화’ 앞에 윤석열 전 검찰총장 등은 다소 초라해졌다. 그동안 보수정치는 ‘윤석열 모셔오기’란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윤석열-이준석 관계에서 당분간 ‘갑’은 이준석 대표이다. 둘째, 그런데 ‘변화’가 과연 ‘바람직한 것’이냐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준석 신임 국민의힘 대표가 경선 과정에서 주장했던 것들을 종합하면 능력주의의 화신이란 평가를 피해가기 어렵다. 능력주의는 능력을 측정한 결과에 따라 자격을 부여하는 걸 핵심으로 한다. 토론배틀 등 경쟁체계로 주요 당직을 구성하겠다거나 지방선거에 공천자격시험을 도입하겠다는 등의 주장은 이 규정에 정확히 들어 맞는다.

‘기성 정치인은 무능하다’는 것은 반기득권 정치 캠페인의 클리셰이다. 그런데 우리 정치의 무능은 정치인들이 경쟁하지 않는 결과인 것일까? 놀랍게도 정치인의 일상은 경쟁 그 자체이다. 언론의 주목을 끌어 인지도를 제고해야 하고 예산을 타내는 신기를 발휘하며 지역구 관리에 매진해야 한다. 하다 못해 공직후보 자리를 놓고 겨루는 당내 경선도 경쟁은 경쟁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정치의 무능은 경쟁의 부재 때문이라기보다는 대중이 요구하는 ‘능력’과 기성 정치가 요구하는 ‘능력’의 차이에서 오는 걸로 봐야 할 것이다.

시험으로 측정하는 ‘능력’은 결국 출제자의 의도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가령 외국어 능력을 가진 사람은 수학 시험에선 무능한 사람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성 정치에서 ‘능력’을 측정하는 시험 출제자가 이준석 대표로 바뀌는 것은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토론배틀은 긍정적 측면이 있다고 본다. ‘토론 능력’을 겨루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정치적 대의를 충분히 펼치고 대중에 검증받을 기회를 늘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컴퓨터 활용이나 자료 해석 능력 등을 요구하는 것은 큰 변화의 계기가 되기 어렵다고 본다. 우리 정치의 무능은 정치인이 컴퓨터 활용을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그러한 실무적 능력은 주류 엘리트 경쟁 체제가 이미 요구하는 것이다. 꼭 국회의원 본인의 컴퓨터 활용 능력이 아니더라도, 이미 현실정치와 관료 시스템이 받아들인 체계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걸 ‘공천 자격화’ 하는 것은 누구를 어떻게 대의할 것인가가 핵심인 대의민주주의의 원리에 맞지도 않는다고 본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14일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아 참배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능력주의에 대해선 좀 더 넓은 의미에서의 비판적 접근도 가능하다. 앞서도 언급했듯 능력은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지기에 능력주의 체제의 구현은 두 가지 현실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첫째는 ‘기준’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끝없이 ‘나’에 유리한 기준으로의 변화를 요구하는 ‘피해’ 서사의 일반화이다. 뒤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능력주의는 ‘공정한 경쟁’이 되지 않고 있다는 부조리를 자기 정당화의 근거로 한다. 따라서 이 현실에서는 능력주의 자체가 능력주의 구현 필요성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능력주의적 현실은 영원히 불공정할 수밖에 없다.

둘째는 능력주의가 능력을 자격화 하기에, 어떤 기준으로도 능력을 측정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선 사회적 합의로서 ‘배제’를 정당화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무능력자’들이 노력만으로 승자가 되는 현실은 없다. 능력주의의 ‘기준’은 지배이데올로기인 글로벌 자본주의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견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처럼 보이는 능력주의 체제는, 예를 들어 하위 20%는 배제하는 걸로 나머지 80%가 합의하는 구조가 되기 십상이다. 이 80% 중 20%는 앞서와는 달리 어떤 기준으로든 능력주의의 승자가 될 가능성이 충분한 사람들일 수 있다. 결국 20%는 배제되고 나머지 20%는 상황을 즐기는 가운데, 남은 중간층 60%가 사안에 따라 능력 평가의 ‘기준’을 둘러싸고 아웅다웅 하는 것이 바로 능력주의 체제이다. 이게 바람직하겠는가?

그럼에도 능력주의의 구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이준석 대표’의 탄생으로 귀결된 이유는 무엇인가? 능력주의는 근대와 함께 도래했는데, 그 핵심은 ‘귀족주의’라는 구체제에 대한 ‘반대’이다. 귀족주의의 시대에도 무능한 통치자는 규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귀족주의가 유지 가능했던 것은 그 시대에 ‘유능한 자’는 자원을 독점한 귀족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근대는 이러한 귀족의 독점을 깨는 것으로부터 왔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가 근대의 핵심 코드인 것은 이런 이유다. 같은 이유에서 그 자체로는 일관된 기준도 없고 지속가능한지도 의문인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는 ‘귀족주의’라는 ‘반대의 대상’을 상정하고 이에 대한 반대를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도구로서 기능할 때만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오늘날의 새로운 귀족으로 지목된 것은 ‘86 정치인’들이다. 그러나 86세대도 86세대 나름이다. 86세대 환원론은 본질적으로 특권층끼리 정파적 경쟁을 위한 동원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정권은 가령 조국 전 장관 문제 등에 대한 태도를 통해 ‘86 세대’를 문제삼는 보수정치의 공세에 정당성을 제공했다. 개혁과 정파적 이익이 같은 방향을 가리킬 때는 개혁의 대의를 주장하지만, 양자가 서로 충돌할 때에는 얼마든지 정파적 이익을 선택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게 지금 집권세력의 ‘개혁 정치’였다.

이러한 결과가 대중의 냉소적 정치관과 만나 이제는 노동조합이나 시민사회단체 등 ‘개혁’과 관련된 모든 것이 새로운 귀족의 일파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여성주의도 마찬가지다. 이 구도에서 대의를 내세우는 모든 것은 귀족들의 ‘나눠먹기’의 수단이다. 진보정치 역시 선거법 개정 국면에서 이 함정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젊은 세대가 보기에는 모두가 타파 대상이고 능력주의는 이 무기로서 호출된 것이다.

‘20대 보수화’는 새로울 것 없는 현상이라는 주장과 분석이 있으나, 중요한 것은 그게 오늘날의 현실에선 정치적 실체를 가진다는 것이다. 가령 이전 세대의 경우는 그게 학생운동이 됐든 ‘더 나은 대안’을 주장하는 진보정치가 됐든 이들을 이념적으로 조직화 하는 수단이 존재했다. 가령 2000년대 초반에만 해도 대중적 인식 속의 진보정치는 ‘지금 현실화 하기에는 너무 이른 정치’였지 개혁-귀족들의 나눠먹기 일파로 평가되진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그렇기에 반기득권 캠페인으로서의 체제 내적 대항 논리만 남은 거다.

이런 점에서 ‘이준석 돌풍’에 대항하기 위한 여당의 이런 저런 시도는 ‘이준석 따라하기’ 또는 그것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가령 ‘70년대생 90년대 학번 박용진’은 ‘이준석 대표’만큼의 변화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이동학 대선기획단장’의 등장은 ‘개혁’을 ‘새로운 귀족’의 핑계로 규정하는 앞서의 프레임을 ??수단이 될 수 있는가?

오히려 ‘이준석 돌풍’에 맞서는 반대쪽의 대안은 한국의 버니 샌더스를 호출할 때만 가능한 게 아닐까? 여기서 버니 샌더스란 ‘노인’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남성’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정파적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개혁’의 대의명분을 주장하며 진정성을 입증해 온 정치적 리더십을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검찰개혁’은 이미 대의명분보다 정파적 이익을 우선하는 상징으로 각인되었다. 선거에 질 것을 각오하더라도, 능력주의가 재생산할 불평등과 맞서면서 이를 위한 다소 간의 손해를 감수하자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어려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쉽지 않은 싸움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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