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칼럼] 31일 한겨레에 실린 안영춘 논설위원의 글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안영춘 논설위원은 최근 남성 비하의 상징이라는 ‘집게손’ 시비를 과거 ‘마녀사냥’에 빗대며 “지식 총량이 압도적인 21세기에 ‘무지몽매’만 탓할 일인가. 착시를 일으키는 만능 덫의 배경을 드러내는 게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마녀사냥이 활개를 치던 시기 오히려 신학교수들이 지적인 근거를 제공했고 “마녀사냥의 배경에 대중의 불신과 불만을 약자에게 투사시키려는 기득권 세력의 전략이 있었음”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집게손’ 논란의 비합리성을 다루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 배경에 ‘불순한 의도’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가령 ‘남성 비하’ 논란을 키워 이득을 얻는 주체엔 조회 수 혹은 클릭 수에 존재의 운명을 걸고 있는 매스미디어가 포함된다. 혐오를 부추기는 득표 전략을 활용하는 기성 정치의 존재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이준석, 하태경 콤비의 ‘이대남 마케팅’은 앞서 글에서 “대중의 불신과 불만을 약자에게 투사시키려는”이란 규정에 정확히 들어맞는 행위다.

그러나 이걸로 ‘21세기 마녀사냥’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음 또한 자명한 사실이다. 배경에 ‘불순한 의도’가 있든 ‘종교적 열정’이 있든, 이런 일은 대중에게 이게 먹힌다는 기본 토양이 이미 조성돼 있다는 현실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중의 ‘무지몽매’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의 새로운 작동 방식과 관계돼 있다는 점을 짚어야 할 것 같다. 이와 관련해선 10일자 한겨레 지면에 실린 슬라보이 지젝의 글을 참고할만 하다. 지젝은 이 글에서 부정선거 음모론을 주장하다 명예훼손 소송을 당한 도널드 트럼프의 전 법률고문 시드니 파월의 사례를 언급하고 있다. 시드니 파월은 자신의 주장에 대해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내용”이라며 따라서 명예훼손이 될 수 없다는 방어논리를 펼쳤는데, 지젝은 여기서 탈진실 시대의 이데올로기 작동 방식의 전형을 발견한다. 즉, 새로운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진실이라고 믿기에는 터무니없지만 그것이 진실일지 누가 알겠는가?’란 형식으로 확산된다는 것이다. 즉, “소문은 사실적 진실을 유예하지만 그럼에도 상징적 효능을 전혀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터넷 일각의 ‘집게손’ 찾기는 누가 봐도 무리수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메갈’로 표상되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국방부를 포함한 사회 곳곳에 침투해 ‘집게손’을 각종 홍보물에 ‘인증’하는 방식으로 목표가 불분명한 ‘공작’을 펼치고 있다는 주장은 얼마나 현실과 가까울까? ‘집게손’을 찾아내는 사람들조차 이 가정이 무리수일 수 있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결론은 지젝이 지적한 바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무리수가 “누가 알겠는가”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중 하나는 여성주의자들도 똑같이 무리수를 동원해 여성혐오의 근거를 주장하거나 ‘미러링’이라는 또다른 폭력을 시행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무리수’도 정당하다는 자기방어 논리이다. 이들이 꼽는 여성주의자의 ‘무리수’의 사례 중에는 본인들이 여성혐오에 대한 규정과 상대의 주장을 오해한 게 다수 포함돼 있지만, ‘여성주의자’들의 주장 중 무리수에 해당하는 게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립하는 양측의 한쪽이 잘못된 일을 했다고 사실이 다른 한쪽의 잘못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상은 어느 한쪽이 하나의 잘못을 했다면 다른 한쪽의 잘못 중 하나는 용인해주는 게 옳다는 식의 논리를 쉽게 인정한다. 세상은 이걸 ‘공정’이라고 부르지만 실상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 재현의 시도일 뿐이다. 그런데 용인돼야 할 ‘잘못’의 규정을 제각각 다르게 한다는 점에서 ‘재현’ 역시 그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함무라비 법전의 21세기판 조문은 ‘눈에는 머리 어깨 무릎 발, 이에도 머리 어깨 무릎 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상대가 뭔가 룰을 어겼다는 하나의 꼬투리를 찾아내기만 하면 무제한적 복수를 정당화할 수 있는 세상인 것이다. 이러다보니 이미 사람들은 서로 ‘무제한적 복수’의 가능성을 전제하는 데 익숙해졌다. 누가 무슨 주장을 하면 시작부터 또다른 ‘복수’의 맥락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대항하는 새로운 ‘복수’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건 ‘사전적 복수’라고 해야 할까? 실제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는 이미 불가능한 지경이다.

30일 반포한강공원 고 손정민 씨 추모현장에 시민들이 모여 있다. (연합뉴스)

최근 불거진 정치사회적 논란이 거의 대부분이 이런 상황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보수정치가 국정원을 동원하였으므로 드루킹의 공작은 불가피했다, 보수정치는 정치보복을 당하였으므로 문재인 대통령은 탄핵되어야 한다, 윤석열 검찰이 과잉수사를 했으므로 조국 전 장관은 구제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남의 기준만 문제삼고 자기 기준의 문제는 말하지 않는다. 김학의 전 차관 출국금지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절차 위반은 수사하고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최재형 감사원장이 탈원전 감사 과정에 대한 수사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해선 ‘정치보복’이라는 기준을 들이미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실제 관심사는 공정과 정의를 실현하거나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애초에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은 일이거나 아니면 이미 포기되었다. 앞서 서술한 우리 정치의 현실은 목표가 아니라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새로운 목표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이러한 현상은 총체적으로 사회 그 자체에 대한 무관심, 즉 무세계성(worldlessness)을 방증한다.

이에 대한 대안적 정치의 반격은 다양한 사람들이 ‘실제로’ 참여할 수 있는 공적 영역을 확대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큰 그림을 말하기에 앞서 태도를 먼저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가 이 세계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문제제기’는 ‘집게손’의 마녀사냥과 유사한 방식의 무리수로 귀결될 가능성이 언제나 있다. 그렇다면 대안적 정치의 가능성은 ‘집게손’ 마녀사냥과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이렇게 해보자. 첫째, 세계를 더 알기 위한 노력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탈진실은 이러한 노력은 불필요한 것이거나 상대의 불순한 의도에 말려들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둘째, 알기 위한 노력의 결과가 내 확신과 다를 경우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한다. 탈진실은 확신이 틀렸다는 걸 안 경우에도 ‘이익’을 위해 진실을 감추는 게 옳다고 주장한다. 셋째, 애초의 대의명분을 잃지 않고 대안을 ‘업데이트’ 해가야 한다. 탈진실은 틀렸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오면 다른 주장을 꺼낸다. ‘업데이트’가 아니라 ‘리뉴얼’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이런 기준을 우리 스스로에 진지하게 적용해본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대다수가 이미 탈진실의 사도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알았다’면 이제 앞서의 제안들을 적용해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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