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실장님'은 한때 로맨틱 멜로드라마의 단골 남자주인공 직업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직장 내 서열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이즈음 실장님은 추억의 직함이 되었다. 실장님 대신 팀장님이 보편적인 시절에 실장님이던 남자주인공는 '멸망'이 되고, '구미호'가 되어 여주인공 앞에 등장한다. 지난 5월 10일 첫선을 보인 <어느 날 우리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와 5월 26일부터 시작된 <간 떨어지는 동거> 얘기다.

물론, 멸망과 구미호가 처음은 아니다. 로맨틱 멜로드라마의 대모 격이라고도 할 수 있는 김은숙 작가가 일찍이 앞서갔다. 2016년 16부작 <도깨비>를 통해 김은숙 작가는 멜로드라마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시공초월 판타지가 된 로맨틱 멜로드라마

그 이전 로맨틱 멜로드라마들의 큰 특징은 현실적이라는 점이었다. 즉 사실은 멋지고 잘생긴 실장님이 평범한 내 앞에 나타날 일도 나에게 집착하다시피 사랑을 할 가능성도 희박한 판타지였지만, 그래도 현실 속 그럴듯한 배경들을 통해 로맨틱 멜로드라마는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사랑 이야기인 듯 보였다.

tvN 10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쓸쓸하고 찬란하神-도깨비>

그런데 2016년 <도깨비>는 그런 로맨틱 멜로드라마의 틀을 깬다. 939년 동안 살아온 '신(神)'과, 그런 신과 함께 살아가는 저승사자가 평범한 인간 여성들을 만나 사랑의 인연을 맺게 된다.

<도깨비>는 그 이후 등장하는 시공초월 판타지 로맨틱 멜로드라마의 전형을 제시한다. 그 첫 번째는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특별한 남자와 평범한 여자 주인공이다. 그런데 이들은 알고 보니 오랜 시간에 걸쳐 얽힌 사연이 있다.

웹툰 원작 드라마 <간 떨어지는 동거> 역시 비슷한 설정이다. 무려 999년을 산 구미호인 남자 주인공 신우여(장기용 분)의 여우구슬을 우연히 대학생인 이담(혜리 분)이 삼킨다. 신우여는 자신의 구슬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이담에게 동거를 제안한다. 물론 이담은 처음엔 거절한다. 하지만 여우구슬로 인해 이담은 고통을 겪는다. 닭띠 남자가 이담을 건드리기만 해도 몸에 힘이 쫘악 빠지고 아프다. 그런 위기에서 이담을 구해낸 신우여. 심지어 1년 안에 구슬을 빼내지 못하면 이담은 죽는단다. 그러니 동거 아니라 더한 것도 할 판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신우여는 이미 이담의 몸에서 여우구슬을 빼낼 방법을 알고 있다(그 방법은 로맨틱 멜로드라마답게 매우 로맨틱하다). 하지만 신우여는 당장 구슬을 빼내는 대신 동거를 제안한다. 우연히 처음 봤는데, 이담을 대하는 신우여의 시선에는 처음 본 이성을 대하는 이상의 복잡함이 느껴진다. 신우여에게는 과거 사랑했던 여성이 있었고, 그 여성과 여우구슬로 얽힌 사연이 또한 있는 바, 그런 과거가 현재의 이담을 보는 시선에 오버랩된다.

생과 사의 운명론적 사랑

'

tvN 월화드라마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

오직 도깨비 신부만이 그 검을 뽑을 것이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검을 939년 동안 꽂은 채 살아온 김신. 그 영생의 삶을 종식 시킬 수 있는 건 '인간 신부'이다. 겉 보기엔 멀쩡한 인간 남자이지만, 알고 보면 신의 영역인 남자 주인공의 아킬레스건은 평범한 여주인공이다. 그리고 아킬레스건의 버튼은 '사랑'이다.

<어느 날 우리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도 다른 듯 비슷한 설정을 보여준다. 교모세포종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동경(박보영 분)은 심지어 같은 날 사귀던 연인이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부인으로부터 갖은 모욕을 받는다. 거기에 더해 회사에서는 상사가 닦달하고, 그녀의 사생활조차 만천하에 공개되어 버린다. 최악의 하루를 보낸 동경은 그날 저녁 홀로 술을 마시다 외친다.

'세상아 다 망해라, 망해버려, 멸망시켜줘.'

그런데 이 단어 '멸망'을 대번에 알아들은 이가 있었다. 신인지 사신인지 악마인지 모를 '멸망'(서인국 분)이다. 동경의 목소리를 들은 멸망은 대번에 동경을 찾아와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한다. 당연히 동경은 자신 때문에 세상이 망해버리는 걸 바라지 않는다. 삶과 죽음을 사이에 두고 아웅다웅하던 두 사람, 그런 가운데 멸망이 동경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그는 여주인공의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죽음을 맞이하기로 한다. 여주인공이 사랑을 하게 되면 멸망이 죽게 되는 것이다.

한 회사에서 혹은 한 공간에서 알콩달콩하며 사랑을 키워가던 로맨스는 이제 시공을 초월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생과 사가 걸린 운명적 사랑이 되었다. 그 옛날 잘난 남자 주인공 집안의 반대는 이제 신과의 약속이나 신탁과도 같은 거대한 운명적 담론의 문제가 되었다.

도깨비나 사신이나 구미호쯤 되어야

tvN 10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쓸쓸하고 찬란하神-도깨비>

하지만 시공을 초월하건, 생사가 걸린 운명적 사랑을 하건, 실장님이거나 멸망이거나 구미호거나 ‘일관된 설정’이 있다. 남자 주인공은 여전히 '백마 탄 왕자님'이 되어 여주인공 앞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더 킹: 영원의 군주>에서 남자 주인공 이곤(이민호 분)이 실제 백마를 타고 등장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도깨비>에서 사람들의 뇌리에 가장 많이 남을 장면은 납치되어 가는 지은탁(김고은 분)을 구하기 위해 도깨비 김신과 저승사자가 걸어오는 장면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간 떨어지는 동거>에서 닭띠인 괴한에게 끌려가던 이담을 구하기 위해 신우여는 공간 이동을 해서 나타난다. <어느 날 우리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 역시 멸망은 죽을 위기에 있는 동경을 구하며 등장한다.

tvN 수목드라마 <간 떨어지는 동거>

도깨비든 저승사자든 멸망이든 그리고 구미호이든, 그들은 한결같이 여주인공을 홀릴 정도로 잘생겼고, 비싼 차를 타며 그 비싼 차에 걸맞은 멋진 복식과 궁궐 같은 공간에서 여주인공을 맞이한다. 게다가 현실의 한계를 넘어 여주인공이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 축지법이나 공간이동으로 여주인공이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다. 부모 덕이 아니면 집을 사는 건 언감생심, 도깨비나 사신이나 구미호쯤 되어야 판타지적 로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현실적 배경에서 시공초월 판타지로 업그레이드된 로맨틱 멜로드라마. 어쩌면 그런 판타지의 확장은 현실의 남자를 통해, 혹은 사랑을 통해 삶의 반전을 꾀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보편적 자각의 반영인 면도 있을 듯하다. <도깨비>가 인기를 끌던 2016년 즈음은 비혼주의가 삶의 한 선택지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던 시기와 맞물리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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