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온이 살아났다. 그것은 분노를 빙자한 공포였다.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 자신들의 권력이 나눠질 수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모두가 세종이 만든 스물여덟자의 문자 때문이었다. 집현전을 철폐하고 재상중심의 의정부 부활하는 대신 한글반포를 용인하기로 했던 세종과 조정중신들의 거래 직전 가리온은 사람을 보내 이신적을 돌아세웠다. 그것은 세종을 분노케 했다. 물론 그 분노는 가리온이 느낀 공포가 아닌 다른 색깔의 감정이었다.

가리온은 한가놈이 분석한 한글의 우수성에 치를 떨었다. 비록 유학을 구성하는 표의문자인 한자와는 다르지만 외국인도, 어린 소녀도 겨우 이틀 만에 배울 수 있는 아주 쉬운 문자가 세상 모든 것들을 표현할 수 있다는 엄청난 일에 공포를 느꼈다. 가리온은 밀본의 최대 강령인 재상 중심의 의정부 체제를 잠정적으로 포기하면서까지 문자반포를 막아야겠다는 본능적인 반응을 보였다. 가리온이 준비한 것은 대단히도 치밀하고도 잔혹한 방법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공작정치를 한 셈이다.

가리온은 좌의정 이신적에게 과거의 시제(문제)를 빼오게 해서 직접 답안을 작성했다. 그리고 그것을 반촌노비 서용에게 들려줘 과장에서 제출케 했고 결국 세종에 의해 장원의 낙점을 받게 됐다. 장원급제한 서용은 임금에게 어사주를 받는 자리에서 자신이 반촌노비임을 밝혀 세종과 중신들을 경악케 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성균관 유생들은 반촌을 돌며 문자를 깨우친 노비들에게서 책을 빼앗아 불태웠으며, 박세명이라는 어린 유생은 압송 중인 서용에게 칼을 휘둘러 살해했다.

놀라운 것은 살기 넘치는 유생의 눈빛이 아니라 수없이 칼에 찔리면서도 덤덤한 노비 서용의 표정이었다. 어지간한 신념이 아니라면 흉기가 자신의 복부를 난자하는 고통 속에서 지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이어 박세명은 성곽 위로 올라가 세종의 문자 반포를 비난하는 글을 읽고 아래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사건이 이렇게 살인과 자살로 이어지자 세종은 고민에 빠져들게 됐다. 이 모든 상황들이 밀본이 조정하는 여론몰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증명할 길도 없기 때문이다. 적은 있지만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막막한 싸움에 세종의 번뇌는 깊어지기만 한다.

그런데 이 일련의 사건 아니 처음부터 세종과 밀본의 싸움에서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반촌노비들이다. 밀본은 뼛속까지 사대부 중심의 사상에 사로잡혀있다. 열을 가졌으면서도 하나도 갖지 못한 백성을 위해 자기 것을 내어놓을 생각이 없는 사대부와 밀본은 당연히 노비들의 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반촌노비들은 사대부인 이신적보다 훨씬 더 밀본에 충성을 보인다. 가리온의 명을 받아 과장에 나선 서용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일을 벌이면서 살아남을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생 박세명의 죽음은 사대부로서의 명분을 갖는다고 하겠지만 서용은 남의 싸움에 목숨 바친 모양새이다. 대관절 왜 반촌노비들은 남의 싸움에 끼어들어 목숨까지 바치는 것인가. 물론 반촌이 만들어지고 유지된 과정에 대한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들이 애초부터 삼봉 정도전에 대한 각별한 의리와 자부심이 있었다는 증명이 있으니 개연성을 갖추고 있다. 그렇지만 밀본의 세상이 도래한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처지는 여전히 노비일 수밖에 없는데도 목숨 건 행동대원으로 나서는 것까지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반촌노비들은 오히려 가리온이 아닌 세종 편에 서야 옳다. 누가 생각해도 그것이 맞는 일이다. 그러나 반촌노비들은 아무런 보상 없는 싸움에 동원되어 기꺼이 희생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일제의 전쟁에 조선 젊은이들이 징용당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희생이다. 징용 한국인들은 그나마 억울함이라도 느꼈지만 그런 감정조차 갖지 못한 반촌노비들의 무의미한 부역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로 그 불가사의한 맹종이 반촌노비들이 무서운 진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가리온은 정체를 모를 적이지만, 반촌노비들은 이유를 모를 적이다. 굳이 따지자면 가리온보다 반촌노비가 세종에게는 더 무서운 적이다. 권력이라는 이유를 가진 이신적 같은 밀본에게는 권력을 나눠주면 그만이다. 그러나 목적도 이유도 없는 반촌노비들과는 애민사상 넘치는 세종으로서는 싸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아주 곤란한 적이기 때문이다.

뿌리깊은 나무가 회를 거듭할수록 어쩐지 과거 이야기가 아닌 한국 현대사를 말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밀본과 가리온이 상징하는 현실의 존재는 아주 쉽게 지목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반촌노비는 과연 누구이겠는가? 그에 대한 답과 반성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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