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나무는 감동적인 드라마다. 부자가 망해도 3대는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조선 500년은 패주와 성군이 모두 존재했지만 왕조를 지켜준 근본적인 힘은 세종에게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성군 세종의 이야기가 현실에 투영되면서 더욱 감동적이다. “지랄하고 자빠졌네”도 그렇고 “겨우 폭력이라니”는 더 더욱 감동적이다. 엄동설한은 아니더라도 입동이 지나 겨울권에 접어든 날씨에 시민들을 향해 물대포를 쏘아대는 요즘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대통령이 꼭 봐야 할 드라마인 것이다.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은 거의 마취수준으로 시청자의 가슴을 훔쳐버렸다. 그래서 용서가 되기도 하지만 밀본과 가리온에 대한 형상화에는 실패했다. 무엇보다 세종과 맞서기에는 소위 ‘급’이 되지 않는다. 가리온이 꽤나 명철한 두뇌와 판단력 그리고 17년이나 신분을 속이고 조선사회 최하급 계급인 백정으로 살아오는 지독한 인내를 가진 무서운 인물로 설정됐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가리온이란 인물의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은 간파하지 못했다.

17년이란 세월은 와신상담하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다. 아무리 밀본의 이념을 지켜야 할 가문의 숙명을 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17년간이나 백정으로 살면서 여전히 철저히 사대부의 의식으로 완고한 모습은 아무래도 의심스럽기만 하다. 똘복이가 같은 시간을 오로지 아비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감히 왕을 죽이겠다는 무모한 목표를 갖고 산 것보다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윤제문의 연기가 아주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가리온와 밀본이 맹목적인 악역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무사 백동수의 맞수 최민수와 전광렬 같은 설득력과 긴장감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세종 정도의 왕이라면 좀 더 완벽한 적수를 만나 싸워서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24부작의 절반 이상이 지난 시점에서 보면 세종과 가리온의 대립은 체급이 맞지 않는 것이 불만으로 남는다. 불공정하다는 것이 아니라 어쩐지 세종에 대한 불경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럴 만큼 세종에 대한 형상화는 완벽하다고 할 수 있다.

세종과 가리온의 대립의 결말은 왕조 사극에서 흔히 보이는 살상의 결말은 아닐 것이다. 어린 시절 정기준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겨우 폭력이라니”하고 냉소했던 세종이니 나중에 밀본과 가리온의 정체를 모두 안다고 하더라도 조선제일검 무휼의 평가로는 천하제일검에 해당하는 논리의 세종은 말로 칼을 대신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천하제일의 언변을 발휘한다고 하더라도 가리온을 굴복시킬 급소를 찾기가 어렵다.

채윤이 다소 싱겁게 세종의 대의에 동참하게 된 데에는 글을 몰라 죽음을 당해야 했던 아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 세종의 스물여덟 자가 먹힐 수 있었다. 그러나 17년을 백정으로 살고도 백성을 가슴에 담지 못한 가리온의 아킬레스건을 찾기가 쉽지 않다. 17년을 피부로 느끼고도 신분제의 모순을 실감하지 못한 이 귀족 독종을 설득하는 것은 채윤보다 훨씬 더 어렵다. 채윤에게는 상처가 모든 이유였지만 가리온에게는 상처와 더불어 욕망이란 것이 존재한다.

채윤은 왕을 죽이고 자신도 죽을 생각을 했다. 자기 목표를 달성한 후 무엇인가를 얻을 생각을 한 것이 아니다. 반면 밀본과 가리온은 왕을 덜미 잡힌 인형처럼 부릴 권력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있다. 비슷한 것 같지만 채윤과 가리온은 근본적으로 다른 집착이었다. 채윤은 그저 왕을 죽이면 그만이었지만 가리온은 왕이야 설혹 죽이지 않더라도 조정의 실권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세종의 생생지락의 왕도와 그로 인한 한글 창제가 채윤의 트라우마를 해소할 수 있었지만 가리온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그동안 생략되었던 가리온의 17년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가문의 염원과 개인의 원한을 해소할 수 있는 또 다른 계기가 그의 지난 17년의 성장에서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가리온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더 남아 있는데 지금까지의 맹목적 악역이 아니라 좀 더 납득할 이유를 가진 악역이 되어야 한다. 가리온이 타당한 인물로 살아나야 세종에 대해 더 감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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