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이 없는 시상식은 없습니다. 수많은 개체들 중에서 소수의 후보들을 선정하고 그 중에서도 승자를 선택하는 것. 그것의 우열을 구분하는 기준과 이유를 제시하고 결정하는 것 그 자체가 권위이고 권력이거든요. 누군가에게, 어떤 작품과 결과물에게 상을 준다는 것은 자신이 그 분야에 대한 상위의 힘과 지배력을 가지고 있음을, 어떠한 가치와 의지를 홍보하고 과시하는 굉장히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상이란 아랫사람에게 하사하는 것이지, 윗사람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거든요.

대종상과 더불어 한 해의 대한민국 영화계를 마무리하고 축하하는 가장 오래된 평가의 장인 청룡영화상에 대해 여러 잡음과 불만, 의혹의 시선과 거부 표시가 끊이지 않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동시에 다른 어떤 시상식보다 많은 이들이 참가하고 그 자리를 빛내는 이유이기도 하죠. 한편에서는 이 시상식의 가장 중요한 스폰서이자 힘인 조선일보의 지원과 그들의 의도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의 반대가 있습니다. 한 신문사가 영화 영역에서의 힘을 과시하고, 자신들의 문화 권력을 뽐내기 위한 자리에 굳이 참석할 필요가 없다는 거부감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에선 언론사의 그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인정하고 기꺼이 협조합니다. 아니면 상의 권위와 신문사의 영향력을 별개로 구분하거나 모른척하며 변명하기도 하죠.

그런데 올해 청룡영화상에서는 이런 배경을 기묘하게 비트는 재미난 장면이 여러 번 연출되었습니다. 공인에게 중요한 것은 중립적인 입장이라는, 그래서 연예인들에게 부과되는 괴이한 침묵의 강요가 수상자들이 자신들의 소감을 밝히는 모습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무시되었거든요. 그것도 특정 부분에 대해서 더더욱 그랬습니다. 민감한 시기이고, 급박한 사정이 조성되고 있는 요즘의 세태 탓이기도 하고, 그 문제가 영화계에 있어서도 결코 모른척할 수 없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스크린쿼터를 유지할 수 없게 되기에 더더욱 그런 것이었겠죠. 바로 11월 22일에 국회에서 가결되어 내년 1월부터 발효될 것으로 추정되는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 FTA에 대한 문제입니다.

올해 엄청난 관객몰이로 인기를 끌었던 최종병기 활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류승룡은 공정한 심사가 될 줄 몰랐다는 놀람과 함께 내년에 심사를 미국 사람이 하진 않겠죠 라는 은근한 비꼼으로 내년부터 찾아올 변화에 대한 걱정을 말합니다. 촬영 장소 헌팅 차 해외 체류 중인 류승완 감독은 부당거래로 감독상을 받으면서 대리 수상한 그의 부인을 통해 훨씬 더 강력한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그의 영화처럼 세상의 모든 부정한 거래를 거부한다는, 그래서 자신은 한미 FTA를 반대한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는 확고한 의지를 전한 것이죠. 지금까지의 어떤 수상소감보다 가장 명백하고 분명한 정치적 발언이었습니다.

물론 조선일보와 스포츠조선은 부당거래에게 최우수 작품상을 안기면서 자신들의 아량을 과시했습니다. 최우수 작품상의 수상 소감에서도 처음으로 그들의 공정성에 동의하게 되었다는 말처럼 그만큼 의외의 선택이었습니다. 조선일보는 조선일보이고, 청룡영화상은 그것과는 별개의 것임을 웅변하는 태도였죠. 하지만 매년 조선일보 사주 일가인 스포츠조선의 사장이 최종 시상식 수여자에게 나와 상을 건네주고, 그것이 이 상이 가지고 있는 권위의 강력한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이런 개념 가득한 배우들의 발언들은 그 어떤 미남 미녀 배우들의 발언들보다 훨씬 더 인상적인 장면이었어요.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조선일보는 한미 FTA의 가장 확고한 지지자입니다. 뼛속까지 친미인 이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 조약의 불가피성과 그로 인한 이익을 옹호하며 자신들의 지지의사를 명백하게 드러냈습니다. 또한 이들은 공인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이상한 강요와 제한을 가하는 선두주자이기도 하구요. 오늘만 해도 자신의 SMS에 정치적인 발언을 남긴 판사에게 중립과 공공성의 의무를 어겼다며 제일 신랄한 비판을 퍼부은 것도 바로 조선일보였습니다. 그러니 류승룡과 류승완 두 류씨의 한미 FTA 반대 발언은 조선일보가 만들어준 잔치에서 한미 FTA도, 공인들에게 정치적 발언을 제한하려는 너희들 주장과 태도가 틀렸다고 저항하는, 이들에게 대놓고 굴욕을 안기는 수상소감이었거든요.

한미 FTA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의 판단은 각자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저는 이런 의사 표명을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이 블로그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언급한 것처럼 공인이 정치적이지 않아야 된다는 이상한 강요와 허구는 대중이 인기인들의 생각과 발언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것이라는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정치를 일부 권력자들의 것으로 한정시키고 특정인들만이 개입할 수 있는 일부의 것으로 분리시키려는, 정치의 일상화를 가로막는 벽이기도 하구요. 누구나, 어디에서든, 어떠한 주장이든 그것을 드러내고 그 평가를 강요하지 않고 각자의 선택에 맡기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민주주의 국가의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가치 아니겠어요?

어쩌면 이런 당연한 요구와 권리가 너무나도 오랫동안 외면 받고 무시당했다는 사실이, 게다가 갈수록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더더욱 이런 답답함이 심해지고 있는 현실이 이들 몇 명의 용기 있는 발언에 통쾌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겠죠. 이런 작은 표현과 발언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린 조금 더 숨쉴만하고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겁니다. 이들의 용기에 진정한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이런 당연한 의사 표현을 용기라고 말해야 하는 지금의 현실이 한숨만 나옵니다. 고작 수상소감 몇 마디에 작은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껴야 한다니. 정말 재미없는 세상이에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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