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그 슬픔과 분노를 극대화시킨다. 이 문학적인 역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상상과 은유가 먼저 필요하고, 그것을 소화해낼 뛰어난 배우의 연기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명대본 없는 명연기란 불가능하다. 뿌리깊는 나무를 통해서 드라마 연기의 새 지평을 써가는 한석규를 가능케 한 것은 우선 훌륭한 대본을 전제로 한다. 그 뿌리깊은 나무 김영현 작가는 한석규를 ‘행간을 읽는 배우’라고 칭찬했다.

거기에 한마디를 더 보태고 싶은 말이 있다. 한석규는 작가의 상상력을 훔쳐내는 배우라는 것이다. 김영현 작가가 행간을 읽는다는 말을 한 것은 달리 말하자면 대본에 없는 것을 읽어낸다는 의미일 것이다. 소설과 달리 상황 묘사가 부족한 것이 드라마 대본이다. 빼곡한 대사와 많지 않은 지문을 통해서 작가의 머릿속에 그려졌던 장면을 본 것처럼 표현하는 것이 ‘행간을 읽는 배우’라면 작가의 상상에서 그려지지 않았던 것까지를 표현하는 것이 ‘상상을 훔쳐낸 배우’일 것이다. 그것은 드라마 분량과 상관없이 그의 존재감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게 된다.

막바지에 다다른 세종의 한글 창제는 밀본의 폭로와 아들 광평의 납치로 일대 위기를 맞았다.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한글 연구에 관한 모든 자료를 은밀히 옮기려고 하다가 습격을 받아 광평대군과 소이가 밀본에 납치되었다. 그러나 도성을 떠나려다가 소이의 편지를 받고 주지소를 찾은 채윤 덕에 두 사람과 자료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소이를 데리고 가려던 채윤과 그를 말리려던 광평 사이에 언쟁이 벌어지고, 사내들이 흔히 그렇듯이 오기 다툼으로 번져버렸다.

채윤은 세종이 아들 목숨을 살리기 위해 한글을 포기할 것이라는 주장이고, 광평대군은 그럴 리 없다고 맞서는 상황이다. 결국 두 사람은 내기를 하게 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채윤이 광평대군을 구해낸 것을 모르는 밀본이 같은 내용으로 방을 붙여 세종을 억압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채윤과 광평의 내기는 밀본과 세종의 협상을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다. 그렇게 채윤은 느긋해졌지만 반대로 세종과 또 광평을 놓친 밀본은 서로 엇갈린 혼란을 겪게 됐다.

세종은 광평을 구해내기 위해 자수한 윤평을 일부러 놓아주고 그 뒤를 무휼이 쫓았다. 탈출한 윤평은 가리온을 통해 알게 된 광평의 은신처로 급히 출발한다. 아직 가리온이 정기준이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 못한 채윤이 광평을 치료하기 위해 가리온을 데려갔기 때문에 밀본은 아주 쉽게 은신처를 알 수 있었다. 물론 무휼 역시 그 뒤를 쫓았다. 그러나 은신처에 먼저 도착한 밀본을 눈치 챈 채윤은 윤평과 무휼 등이 오기 전에 먼저 몸을 피했다.

그 와중에 밀본이 붙인 방으로 조정과 도성이 발칵 뒤집힌 상황이었다. 세종 입장에서는 한글 창제에 대한 중신들의 의문제기에 대한 입장을 밝혀야 하는 것까지 겹쳐 진퇴양난이었다. 아무리 대의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어떤 아비가 아들의 희생을 당연시할 수 있겠는가. 세종은 고뇌한다. 그렇지만 고뇌한다는 것 자체가 아들 때문에 대의를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고뇌의 끝은 흔들림이 없었다. 경연에 나선 세종은 밀본과 중신들을 향해 “지랄하고 자빠졌네”로 일갈했다. 아들을 포기해야 하는 아비의 분노까지 겹쳐져서 그 어느 때보다 세종의 욕은 힘이 실렸고, 중신들은 한마디 항변도 하지 못할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아들의 목숨을 포기하고 대의를 선택한 아비로서는 지옥의 절규나 다름없었다.

중신들에게 아니 밀본에게 “겨우 폭력이라니”라는 함축적인 냉소를 남기고 돌아선 세종은 다시 아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아비의 독백은 참으로 처절하게 전해졌다. “광평아 나는 이리 하였다. 앞으로 네가 어찌 된다 해도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참아낼 것이다” 세종은 다시 슬픔과 분노보다 더 큰 대의의 무게로 가슴을 억눌렸다.

이 말은 앞서 집현전 학사들의 죽음에 괴로워하며 소이와 필담을 나눌 때가 떠오르게 한다. “나를 위해서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말라”는 세종말은 다시 똘복에게 “임금이 태평한 태평성대를 보았느냐. 내 마음이 지옥이기에 그마나 세상이 평온한 것이다”라고 이어진다. 지옥을 마다않는 마음이란 납치된 아들의 목숨을 그저 마음에서 놓아버린 아비의 마음이다. 그리고 그 아들을 위해 눈물조차 흘리지 않겠다는 지독한 다짐을 해야 하는 것이 임금의 지옥이다.

아들의 목숨조차 가벼이 여기는 마음, 지옥을 마다않는 달마의 마음으로 세종은 한글을 만들었다. 그런 세종이 조상이라는 것이 참 가슴 벅차게 뿌듯하다. 또 그런 세종이 다시 살아온 것처럼 그려내고 있는 한석규의 깊은 연기에 마음이 사무친다. 이런 배우 하나면 헐리웃 배우 열이 부럽지 않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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