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심영섭 칼럼] 7년째 4월 16일을 맞이했다. 행사장엔 때아닌 정치인들로 북적였다. 이날엔 ‘집권시민단체’를 동원하여 폭식 투쟁을 부추기고 자식들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해 달라고 부르짖는 유가족을 조롱하던 이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2016년 늦가을에서 2017년 봄으로 눈보라 치는 긴 추위를 견디며 촛불을 밝혔던 사람들은 ”민중적 자부심과 민중적인 배짱을 갖고 소신대로 한번 해보시오!”(고 백기완)라는 제안과 함께 현 정부를 주권자의 이름으로 전폭 지지했다. 그러나 세월호 유가족은 죽은 아이들의 억울함을 신원하지 못한 채 청와대 앞마당에서 여전히 농성 중이다. 폭식 투쟁을 하던 이들과는 달리 누군가는 침묵 투쟁 중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22부는 지난 2월 15일 김석균 전 청장 등 해경 구조 관련 책임자 9명의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김 전 청장 등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때 구조에 필요한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아 303명이 숨지고 142명이 다치게 한 혐의로 지난해 2월 재판에 넘겨졌지만, 1심은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09:05경에 퇴선 명령을 했으니 기록해라." 하지 않은 지시를 했다고 문서를 조작한 것은 유죄라고 했다. 그러나 조작하여 숨기려 했던 '업무상 과실'인 퇴선 조처를 하지 않은 점은 죄가 아니라고 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해경은 구조에도 실패했고 진실규명에도 무관심했지만, 자신들의 무능은 적극적으로 은폐해 왔다. 그들은 국정조사와 감사원 감사를 앞두고 교신 녹취록의 일부를 삭제하고 함정일지를 조작했다. 그러나 이 모두가 무능했을 뿐, 업무상 과실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구조업무를 회피했거나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재난 상황에서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검경합동수사본부도 현장지휘관이었던 123정장을 제외한 해경지도부는 수사대상으로 보지도 않았다. 2019년 11월 출범한 검찰 '세월호 참사 특별 수사단'은 뒤늦게 해경 지휘부를 수사하고 기소했지만, 해경 구조 관련자들에게 면죄부만 줬다. 법원은 공무원이 공무 수행 과정에서 허위사실을 공표했고, 공무 기록을 조작했음에도 죄를 물을 수 없다고 보았다. 법관들도 지금까지 그리 해왔기에 당연하다는 것인가? 알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23일 오후 청와대에서 이현주 변호사에게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특별검사 임명장을 수여한 뒤 환담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4월 23일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특별검사’를 임명했다. 지난해 말 특검법을 통과시킨 국회는 세월호 참사 7주기가 되어서야 특검 후보를 복수 추천했다. 지난 4월 16일 전격적인 ‘기억식 참석’이라는 정치쇼를 치른 직후였다. 이번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특별검사’는 △세월호 폐회로텔레비전(CCTV) 데이터 조작 의혹 △해군·해경의 DVR(CCTV 저장장치·세월호의 블랙박스 격) 수거·인수인계 과정에서의 조작 의혹 △DVR 관련 청와대 등 정부 대응의 적정성 등을 수사하도록 법은 정하고 있다.

과연 이번엔 특검이 일명 ‘조작 의혹’을 밝혀낼 수 있을까? 비록 일곱 번째 사월이 지나갔고, 그 사월의 진실은 뭍으로 나오지 못한 채 바닷속에 잠겨있더라도, 그래도 희망은 여전히 존재한다. 희망 없이 어찌 지난 7년을 버텨왔겠는가! 올해도 언론은 마치 다시 돌아온 3.1절을 기념하듯, 4월을 보도했다. 그리곤 다시 부동산과 암호화폐와 주식, 부족한 백신 그리고 남아돌게 된 백신에 몰입했다. 언론은 언제나 그래왔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인천을 떠나 제주도로 향하던 연안여객선 세월호는 진도 앞바다를 지나다가 8시 49분 기울기 시작하여 10시 31분 병풍도 앞바다 맹골수도에서 침몰했다. 이 배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났던 단원고 학생 338명과 일반 승객, 승무원 등 모두 476명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MBN은 11시 1분 7초 “단원고 측 학생 모두 구조”라고 자막을 내보냈고, MBC는 11시 1분 26초에 “안산단원고 학생 338명 전원구조”라는 자막을 내보냈다. 세월호는 8시 49분 처음 기울기 시작했고 YTN에 첫 보도가 나간 건 9시 19분이었다.

해경이 처음 도착한 건 9시 34분이었고 10시 31분에는 배가 완전히 뒤집혔다. 방송 속보에 ‘전원구조’라는 자막이 뜨던 그 시점에는 이미 승객들의 생존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이었지만, 방송에서는 낙관적 보도가 계속되었다. 심지어 MBC는 팽목항 현장에 나가 있는 목포MBC기자가 “전원구조가 아닐 수도 있다”라고 거듭 보고한 뒤에도 ‘전원구조’ 자막을 내보냈다. 연합뉴스는 세월호 침몰 8일째인 4월 24일자 보도에서 "물살이 평소보다 크게 약한 소조기가 이날로 끝남에 해군과 해군구조대, 소방 잠수요원, 민간 잠수사, 문화재청 해저발굴단 등 구조대원 726명이 동원됐고 함정 261척, 항공기 35대 등의 장비가 집중 투입됐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사고 현장에 투입된 잠수사는 13명이 전부였다.

그 시각 박근혜 전 대통령은 여전히 잠에 취해서, 침실에서 나오지를 못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잠들어 있는 동안 관료들은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다. 그러나 언론은 세월호 참사가 왜 발생했는지, 구조작업은 왜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지 따지지 않았다. 권력과 함께 ‘자발적 집행인’이 되어 ‘아름다운 전원 구조’ 신화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2016년 늦가을에서 2017년 봄까지 광화문 광장을 가득 채운 채 촛불을 든 시민들이 요구한 것은 국가는 어떻게 무능했고, 그 무능을 은폐하기 위해 국가는 어떻게 공권력을 오용했는지 그리고 언론은 어떻게 ‘악의 평범성’에 부역했는지 알고자 한 것이다.

3월 31일 오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스텔라데이지호 침몰사고 4년째를 맞아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한 스텔라데이지호와 세월호 희생자 가족이 기자회견을 지켜보며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나마 지난 2017년 3월 31일 우루과이 앞바다에서 침몰한 스텔라데이지호 사건보다는 자주 보도한 것으로 위안으로 삼아야 하는가? 스텔라데이지호는 4년이 지나도록 침묵하고 있으니, 이쯤이면 충분히 배려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마저 나온다. 아니다. 스텔라데이지호도 밝혀야 할 사건의 하나로 여전히 남아있다. 침묵한다고 사라지지는 않는다. 어쩌면 자신들이 만든 ‘난장’이 버거운 정치인과 언론인들은 세월호 사건도 1993년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나 1994년 성수대교 교량 붕괴 사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1999년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화재 사고, 2003년 대구지하철 방화로 인한 전소 사고처럼 대형사고의 하나로 묻히길 바랄지도 모르겠다.

감당할 수 없는 비극 앞에서 가장 손쉬운 방법은 눈을 감고 침묵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를 잃은 부모들은 여전히 기억과 싸움을 벌이고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책임회피에만 급급한 행정부와 입법부 그리고 이를 추인하는 사법부에게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떠나보낸 이들을 제대로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은 전 국민이 언론을 통해 세월호 침몰을 생중계로 지켜봤었고, 무기력한 해경과 해군의 구조 실패와 국가 권력의 무능도 함께 지켜봤다. 그 과정에서 국가가 증발하는 모습까지 지켜봤다. 그 시간을 함께 지나온 아이들이 ‘세월호 세대’로 명명된 채 20대를 맞이했다.

이제 정치도 언론도 그리고 우리 사회도 망각하고 싶은 욕망을 버려야 한다. 폭식 투쟁을 주도했던 야당도 침묵 투쟁을 하는 여당도 더는 세월호를 정략에 이용하지 말고, 봉인을 풀어야 한다. 세월호 사건은 결코 재판을 통해 끝나지는 않는다. 진실을 인양할 때 비로소 마무리될 것이다.

세월호 참사 7주기를 맞은 16일 광주 동구 5·18민주광장에 마련된 시민 분향소에서 참배객이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연합뉴스

1966년 10월 21일, 영국 웨일즈의 한 광산마을에서 노천광산이 붕괴하면서 물에 젖은 석탄 부유물에 파묻혀 144명이 압사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은 마을 초등학교였다. 다섯 명의 교사와 109명의 아이들이 희생되었다. 애버반(Aberfan) 사고가 발생했던 첫 주, 갓 집권한 노동당은 오랫동안 붕괴 위험을 무시하고 상황을 오판한 보수당 정권에 참사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사건 발생 50년이 지난 2007년에야 후속처리가 완결된 무능과 태만은 노동당 정권의 귀책이었다. 아이들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영국 여왕이 사고 발생 보름이 지나서야 사고 현장을 방문한 것은 민중의 고통에 감응하지 못하는 저속한 정치를 보여준 사례였다.

에버반 참사처럼 50년간 누군가의 탓을 하며 관료 뒤에 숨어 있을 것인지, 아니면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과정과 결과에 대한 비판을 온전히 받아들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책임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와 특별검사에게만 떠넘기고 침묵하는 ‘기억의 외주화’로는 칠 년이 아닌 십 년이 지나도 진상은 규명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선한 기억을 만들기 위해 병풍도 앞바다에 침몰한 진실을 인양할 시간이다. 다시는 또 다른 4월 16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 심영섭 경희사이버대 미디어영상홍보학과 겸임교수 칼럼은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언론인권통신' 제 903호에 게재됐으며 동의를 구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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