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추노 등의 성공 때문인지는 몰라도 2011년 방송가에는 유난히 사극이 눈에 띈다. 양적으로도 많아지기는 했지만 무엇보다 사극불패현상이 이런 현상을 부추기는 것으로 보인다. 헌데 2010년부터 한국 사극은 많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왕조나 양반에 붙잡혀 있던 카메라 앵글이 한참 하강하여 노비들에게 달라붙었고 시청자는 환호했다. 그런가 하면 허당숙종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전에는 생각도 못할 새로운 왕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2011년 사극을 아주 단순화하자면 영웅노비와 허당임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던 사극이 2012년 들어서는 욕세종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세종이 누군가. 조선왕조 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이며 어쩌면 5천 년 역사를 통해서 가장 훌륭한 유산을 물러준 조상일 수도 있는 대상이다. 설혹 세종의 실제 성품이 그랬다하더라도 과거 같았으면 “우라질” “지랄” 등의 단어를 입에 담는 왕의 모습을 드라마에서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파격적인 장면들은 뿌리깊은 나무에서 좀 더 과격하면서도 은유적인 모습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일개 궁녀를 골려먹는 게 취미인 임금님 세종은 입에 욕을 달고 산다. 왕은 누구보다도 일찍 유학을 배우고 그 실천을 강요받는 삶을 산다. 왕이 된다고 해서 그 배움과 실천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세자 때에는 서연, 왕이 되서도 경연 시간이 주어져 왕은 죽을 때까지 ‘학이시습지’를 반복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런 입에서 우라질이라니...
임금은 무치라고 해서 어떤 일을 해도 흠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환갑을 넘긴 왕이 이팔청춘의 궁녀와 침소에 든다고 해도 그것은 파렴치한 짓이 아니라 승은이 된다. 당연히 모든 남자들의 로망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왕의 무치를 탐한 과거의 대통령들은 안가로 여자 연예인들을 불러들이기도 했다. 만약 동이나 뿌리깊은 나무가 몇 십 년 빨리 방송됐다면 그런 일은 좀 없었을 수도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이처럼 왕의 근엄함이 최근 사극을 통해서 마구 망가지고 있다. 이에 대한 반발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환영하는 쪽이 압도적으로 많다. 사실 여부를 떠나 왕에 대한 이런 발칙한 해석을 반기는 이유는 아마도 아닌 왕이나 대통령을 군림하는 절대권력이 아닌 친근한 이웃처럼 실감하고 싶은 열망의 투영일 것이다. 보수가 집권하건, 진보가 집권하건 서민들의 삶은 큰 변화가 없다. 정치는 누가 하건 사소한 곳에는 손길이 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허당숙종이나 욕세종 같은 대통령이라면 서민들의 삶을 직접 바라보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런 바람이 현실이 아니라 드라마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