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한때 한국 사회에서 '노마디즘'이 화두가 된 적이 있다. 소련과 동독이 붕괴하며 세계를 양분하던 현실 사회주의의 유효성에 의문이 제기되자, 철학적 화두로 노마디즘이 등장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2002년 이진경의 저서 『노마디즘 1, 2』을 통해 소개되었지만, 이 개념은 1968년 질 들뢰즈의 저서 『차이와 반복』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노마드(nomad)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유목민을 뜻한다. 그리스어 nomos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지칭한다. 유목주의로 번역되는 노마디즘은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불모지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일체의 방식으로 정의된다. 2000년대 우리 사회에 등장한 노마디즘은 진보적 사상의 기반에 대한 새로운 '방황'의 화두가 되었다. 기존 사회주의는 대안이 되지 않고, 신자본주의는 강고해지는 세상에서 철학은 과연 어떤 '해석'의 무기를 가져야 하는가라는 정처 없는 고민이 '노마디즘'으로 대변되었다.

하지만 노마디즘은 그저 철학적 대안 모색을 넘어 현대 사회의 문화심리적 현상을 해석하는 도구로도 쓰인다. '디지털 노마드 족'과 같이 특정한 삶의 가치와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탈주'하여 여행을 떠나는 사유의 스타일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노마드, 노마디즘은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 우선은 기존 삶의, 혹은 사유의 방식에 더는 머무를 수 없음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탈주하여 주유하는 삶의 방식, 사유의 스타일이 대안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지난 4월 15일 개봉한 영화 <노매드랜드>는 그러한 노마디즘적 삶의 방식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길을 떠나다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이미지

펀(프랜시스 맥도맨드 분)는 석고 광산에서 일하게 된 남편을 따라 네바다주 엠파이어에 정착했다. 남편이 일하던 석고 광산 인사과에서 일하기도 하고, 지역 학교에서 보조교사로도 일했다. 하지만 미국을 덮친 경제위기는 삶의 터전이었던 석고 광산을 폐업시켰다. 석고 광산에 깃들어 살던 지역은 급격하게 무너져갔다. 사람들은 그곳을 떠났다. 펀 부부는 떠날 수 없었다. 남편이 암 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고통스럽게 투병하는 남편 곁을 지켰지만 결국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삶의 기반도, 가정도 잃은 펀. 그녀는 작은 밴에 우선 자신을 의탁한다. 하지만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남편에 대한 미련도, 오랫동안 펀 부부가 살아온 엠파이어에 대한 애착도 놓을 수 없었던 펀은 자신이 살던 주변을 맴돈다. 삶은 그녀에게 더이상 머물 수 없다고 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주변을 떠돌던 그녀가 세계적 유통기업 아마존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연말 늘어난 택배 물량에 맞춰 긴급하게 수급된 포장 '알바'이다. 그녀의 손을 거쳐 세계를 향해 떠나는 물건들, 그건 그저 그녀에겐 일용할 양식의 수단일 뿐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펀은 그녀처럼 또 다른 '노마드'족을 만난다. 자신처럼 차 한대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펀에게 그녀는 기꺼이 노마드 공동체를 소개한다.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이미지

차 한 대에 의지하여 사는 처지임에도 아직 살던 공간을 떠날 엄두가 나지 않는 펀이다. 결국 혹한의 추위와 더는 머물 수 없는 상황이 펀을 노마드 공동체로 향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곳에서 펀은 자신과 같은, 하지만 저마다 다른 이유로 '길'에 나선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누군가는 사놓은 카누를 타보지도 못한 채 일만 하다 세상을 떠난 배우자로 인해 길을 나섰다. 또 다른 누군가는 자살한 아들에 대한 상실감을 견디지 못해 길을 나섰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평생 열심히 일만 하며 살아왔지만 결국 길에 나설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도 한다. 상처와 상실, 혹은 구조적 위기 등 저마다 다른 이유로 사람들은 길 위로 내몰리게 되었다.

하지만 펀을 맞이한 공동체는 그곳이 내몰린 곳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여정이 시작되는 곳임을 알려준다. 죽음의 선고를 받고 병원 대신 자신에게 삶의 의미를 깨우쳐 준 자연을 찾아 떠나는 스완키처럼, 그곳에는 '정착'의 삶이 보여주지 않는 또 다른 삶의 '광경'이 있음을 알려준다.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이미지

본의 아니게, 그리고 머뭇거리며 노마드의 삶에 한 발씩 내딛는 펀. 그런 그녀에게 기존의 세상은 여전히 손을 내민다. 차 수리비 2000달러를 빌리기 위해 들렀던 언니는 여전한 혈육의 정으로 그녀에게 자신과 함께 머무를 것을 청한다. 하지만 경제위기로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그녀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집 투기를 통해 소득의 상승을 자랑하는 언니 주변 사람들과 그녀는 화합할 수 없다. 아니 폐차 처분하는 게 낫다는 차량 수리점의 조언에 '그냥 차가 아니라구요'라며 절규하듯 반박하는 펀에게 노마드의 삶은 자신을 지키는 마지노선과 같은 것일 수도.

또 다르게 손을 내미는 이도 있다. 머물던 공동체에서 만난 사람. 유독 펀에게 호의를 보이던 노마드 족이었던 남자는 아들 내외와 함께 정착한 ‘집'으로 펀을 초대하고 자신과 함께 살아갈 것을 청한다. 하지만 그가 제공한 말끔하고 푹신한 침대가 아니라 자신의 차로 돌아와서야 숙면을 취하는 펀에게 이미 '길'은 집이 되었다. 정착하는 대신 펀은 길을 떠난다. 남편과 함께 살던 네바다 주변을 머무르던 펀은 이제 조금씩 세상을 향해 나선다.

그리고 세상을 주유한 펀은 다시 그녀가 살았던 네바다로 돌아온다. 혹시나 해서 맡겼던 짐을 이제는 홀가분하게 처리하며 자신과 남편의 삶이 담겼던 공장과 집을 돌아본다. 길 위의 삶이 그녀에게 비로소 지난날을 직시할 용기를 준 것이다.

떠남, 또 다른 삶의 방식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이미지

떠남은 그녀 자신이 넘어설 수 없었던 상처를 치유하고, 나아가 스스로 설 수 있는 시간의 회복을 준 것이다. 영화 속 펀은 죽어가는 남편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죄책감, 평생 열심히 일해왔지만 차 한 대로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상실감을 '노마드'의 시간을 통해 회복했다.

영화는 길 위로 나선 펀을 통해 이 세상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삶의 형태로서의 '노마디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정상적 삶의 공간에서 쫓겨난 어쩔 수 없음이 아니라, 자연을 향해 열린 삶의 터전으로서의 노마디즘이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개인이 아니라, 연대의 ’공동체‘로서의 노마디즘을 말한다. 그리고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깃들어 살아왔던 자본과 관계의 삶에 대한 '사유'를 청한다. 떠나고 버림으로써 비로소 돌아보게 되는 '현실'인 것이다.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에서 자크 아탈리는 유구한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에서 '정주성'을 겨우 1만 년의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았다. 외려 인간종이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래 끊임없는 ‘유목’의 특성이 있었기에 전 세계에 걸친 인간의 '생존'을 가능케 했다고 하였다. 즉 인간은 삶의 위기를 맞이하면 늘 떠났다는 것이다. 떠남을 통해 삶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라는 자크 아탈리의 정의는 영화 <노매드랜드>가 다시 증명한다.

21세기 경제적 실존의 문제로, 사회적 관계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에게 세상이 당신을 치유할 수 있으리라 영화는 말한다.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비롯하여 골든 글로브 작품상, 전미 비평가협회상의 수상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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