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나무는 이제 시즌2에 들어섰습니다. 가리온이 밀본의 3대 본원이라는 반전이 밝혀진 이후, 복잡하고 조금은 어수선하게 뒤엉켜 있었던 인물소개와 갈등 구조가 세종의 집현전과 정기준의 밀본이라는 명확한 대립 구도로 정리되었거든요. 이제 이 드라마의 전개 방향은 한글창제를 둘러싸고 성군인 세종과, 그가 뛰어난 왕이기에 더더욱 그를 저지하려는 밀본의 싸움이 중심에 설 것입니다. 여러 차례 되풀이되었던 논쟁인, 위대한 독재자와 평범한 민주주의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라는 선택지의 묘한 변형인 셈이죠.
물론 여기에서 밀본의 의지는 왕권의 견제와 균형보다는 기득권 수호, 불평등한 신분질서 옹호, 성리학 중심의 완고한 세계관, 태조 이방원에 대한 분노나 복수와 같은 사리사욕과 섞여 있기에 결코 긍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드라마는 끊임없이 세종의 입을 통해 정도전의 길과 정기준의 길을 구분하려 애쓰고 있구요. 새삼 깨닫게 되는 세종대왕 이도의 위대함, 똘복이의 방황과 복수의지, 한글의 독창성과 소중함 등등의 수많은 내용의 가지를 뻗고 있지만, 올바른 왕권정치와 잘못된 신권정치 사이의 갈등이 이 드라마를 구성하는 중요한 축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 인물이 누구인지 짐작하시겠나요? 우리가 이미 얼마 전 공주의 남자에서 만났던 남자. 무수히 많은 드라마에서 변주를 거듭하며 친숙해진 유명인. 희대의 모략가이자 야심가, 세종의 시대가 아닌 세조의 시대를 지배했던 남자. 한명회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다소 성급한, 분명 너무 멀리 나아간 추측이긴 하지만,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한가놈의 모습에서 한명회의 그림자가 떠나질 않아요. 아니. 이런 추측이야말로 이 드라마의 깊이와 의도를 더욱 완성도 있게 이끌어 주기에 더더욱 그렇구요.
우선 상황과 배경, 그리고 인물 묘사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세종의 치세 당시, 한명회의 신세는 고향을 떠나 여러 차례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만 계속 떨어지는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무늬만 양반이었지 저자거리의 왈패들과 어울리며 친분을 쌓았고, 이를 통해 알게 되었던 주먹꾼들을 수양대군에게 소개시켜주기도 했습니다. 아첨과 모략, 술수에 능했으며 권력의 오른편에 서서 실권을 휘둘렀었죠. 심종수의 호통에 사당의 바닥을 기며 비굴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정기준과 은밀한 계략을 도모하고, 밀본의 회합에선 정기준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한명회를 떠올렸던 것은 무리일까요?
하지만 길게 본다면 한명회야말로 사대부의 자리를 왕보다 능가하게 만들었던, 왕권을 약화시키고 조선을 사대부의 것으로 만든 장본인입니다. 세조의 죽음 이후, 공신들을 중심으로 권력을 쌓아올리고 각종 사화와 반란의 원인을 만들며 결국 왕을 유명무실한 존재로 만들었던 출발점은 바로 한명회였어요. 그만큼 왕은 꽃에 불과할 뿐, 조선의 뿌리는 사대부라는 밀본의 지시를 철저하게 이행했던 사람은 없습니다. 정도전이 꿈꾸는 이상화된 재상 정치가 아닌, 그야말로 일부 권문일족의 탐욕과 야심만을 철저하게 구현했던 인물. 지금 뿌리깊은 나무에서 묘사하고 있는 삐뚤어진 밀본을 현실화한 인물은 바로 한명회였어요.
한 등장인물의 정체를 짐작하다 너무 멀리까지 넘어왔나요? 꿈보다 해석인가요? 분명 이런 상상은 분명 억측과 과한 억지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런 상상과 평가를 내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역사적인 고증에 충실하면서도, 그 안에 새로운 해석과 의미를 불어넣은 잘 만들어진 사극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이렇게 약간 빈 공간을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퍼즐 조각으로 채우면서 또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거든요. 그만큼 뿌리깊은 나무는 보는 재미, 즐길 재미가 가득한 멋드러진 작품입니다. 벌써부터 다음 방송에서는 어떤 내용을 다룰지 궁금해지는걸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