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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나무, 무사 무휼의 이중생활[블로그와] 탁발의 티비 읽기
탁발 | 승인 2011.11.17 09:31

뿌리깊은 나무는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다. 조선의 성군 세종의 이야기니 허투루 다룰 수 없는 것은 그의 후손이라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다큐멘터리가 아닌 드라마에서 한 시간 내내 그 중량감을 고수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시종 무거운 호흡이 흐르다가도 가끔씩 시트콤을 살짝 연출하고 있다. 그런 뿌리깊은 나무 무게 줄이기에 주로 동원되는 배우는 똘복의 동료들이다. 정별감, 초탁, 박포 등은 뿌리깊은 나무에서 감초를 명받은 이들이다.
 
그렇지만 실제 웃음은 그들보다 지엄하신 세종을 통해서 더 자주 배출된다. 세종은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때때로 망중한에 빠지듯이 주변 사람들을 골리는 고약한 버릇을 갖고 있다. 세종의 버릇은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는다. 개소리를 흉내 낸 옥떨이의 소리를 “왕왕” 짖는 것 같다고 대답한 궁녀에게 세종은 “그럼 내가 개라는 말이냐”고 정색을 했다. 당연히 궁녀는 곧바로 땅에 엎드려 용서를 구했으나 그것은 세종의 짓궂은 장난이었다.

   
 
그 장면만 볼 때에는 격무에 시달리고, 그래서 육식을 즐겨하셨다던 세종의 남자로서의 모습을 은유하나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다. 강채윤은 세종이 공포에 대한 귀띔을 듣고 가리온의 누명을 벗겨 주었다. 그런 채윤이 기특했는지 안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그 만족감이 넘쳤는지 다시 장난기가 도졌다. 뿌리깊은 나무 열혈팬에게는 도휼라인(이도-무휼)의 레어템에 속하는 이 장면에서 세종과 무휼은 마치 남녀관계인 양 놀리고, 변명하고 심지어 ‘나 잡아봐라’를 연상케 하는 ‘약 올리고 도망치기’도 보였다.

그 전에 강채윤에게 공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돌아오는 길에 세종은 무휼에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불평을 한다. 그것은 지존이 자신을 호위하는 심복에게 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드라마 망상족에게는 혹시 두 사람의 러브라인에 대한 복선이 아니냐는 설레발이 나올 정도로 살가운 뉘앙스가 전해졌다. 물론 그것은 도가 지나친 상상일 뿐이다. 어쨌든 세종과 무휼의 관계에는 군주와 무사 그 이상의 감정이 흐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다보니 왕이 주인공인 사극 뿌리깊은나무가 다른 왕조 사극과 크게 달라진 부분이 생겼다. 바로 상선(내관)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사극의 왕 옆에는 그림자처럼 상선이 동행했다. 심지어 내관이 주인공인 드라마도 있었다. 왕의 공식적 명령은 지신사(도승지)가 출납을 담당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상선이 도맡아서 전달하는 것이 익숙하다. 지금까지의 사극은 모두가 그렇게 표현했다.
 
그런데 뿌리깊은나무에서는 그 자리를 내금위장인 무휼이 대신하고 있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무휼의 이미지적 무게는 주연에 가깝지만 실제 스토리에 개입하는 대사는 별로 없다. 무휼이 주로 하는 대사는 “전하”이다. 그리고 어디 가냐, 뭘 할까 등등으로 사실 기존 사극이라면 상선이 해야 할 몫이다. 무휼 때문에 상선 역을 할 배역이 하나 줄어버린 것이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상당히 웃긴 상황이다.

14회 예고는 대단히 심각한 상황을 그리고 있다. 세종은 자신에게 오는 채윤의 길목을 모두 열어놓으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채윤은 세종에게 칼을 겨눈다. 당연히 무휼 역시 칼을 뽑아 채윤의 목에 드리운다. 세종은 칼을 내리라고 하지만 무휼은 “전하의 길과 이 놈(채윤)의 길이 있다면 무사~ 무휼의 길도 있는 것이옵니다”라며 왕의 명을 거부하는 장면이다. 사실 이 대사는 “무사로서의 저의 길” 정도로 표현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러나 젊은 세종의 명으로 감히 상왕인 태종에게 칼을 뽑으며 비장하게 외친 “무사~ 무휼”의 인기도를 감안한 대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멋지다.

   
 
무휼은 공식적으로 조선제일검이다. 비공식적으로 이방지에게 패한 기록이 있어 무휼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지만 세상은 그를 그렇게 부른다. 실제로 채윤도 버거운 출상술을 가진 윤평과의 맞대결에서 무휼은 화려하지 않지만 무거운 내공의 힘으로 그의 이름값을 해냈다. 그리고 윤평의 비겁한 수에 눈을 뜨지 못해 맥없이 당할 뻔한 죽음의 목전에서 무휼은 그의 창을 던져 위기를 모면케 했다. 역시 멋지다.

그런데 그런 장면들조차도 어쩐지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아니 귀엽다. 온갖 비장함과 근엄함으로 무장한 그의 외침들 사이로 보이는 토끼를 닮은 앞니 때문이 아니다. 비장함으로 넘쳐야 할 무휼은 세종의 장난끼 때문에 앙탈과 애교 범벅인 무사가 돼버렸다. 무휼은 세종에게는 한없이 든든한 호위무사이자 앙증맞은 여동생 같은 존재다. 그런 무휼의 이중생활은 무거운 주제 속에서 시청자의 마음을 가볍게 해준다. 무휼 역의 조진웅은 진작부터 잠룡이었다. 뿌리깊은 나무를 통해 그의 비약이 강력하게 예고되고 있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탁발  treeinu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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