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생뚱맞기는 하지만 잠깐 야구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한때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던 프로야구가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대중들의 외면을 받기 시작했다고 칩시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중흥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고 상상해 보자구요. 그동안 야구계를 주름잡던 위대했던 전설들, 그리고 훌륭한 장점을 자랑했던 재능들을 모아놓고 매주 어떤 투수가 가장 빼어난 실력을 가졌는지 순위를 매기는 방법으로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떻게 투수의 능력을 일률적인 순위로 정할 수 있냐는 반발도 있었지만 이런 새로운 접근 방식이 대중들에게 굉장한 관심을 끌면서 단숨에 인기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야말로 다양한, 여러 투수들이 모여 매주 빼어난 투구 능력을 자랑했으니까요.

전설로 통하는 우완 정통파 투수, 빼어난 제구력을 자랑했던 백발의 노장, 아직도 마구로 불리는 결정구를 가진 변화구 마스터, 승리 공식으로 불렸던 철벽의 마무리 등등. 다양한 투수들이 모여서 기기묘묘한 미션들을 수행하며 자신의 능력을 자랑합니다. 메이저리그를 평정했던 우완 파이어볼러가 사이드암 포즈로 145km의 강속구를 찍습니다. 잠수함 마무리 투수가 선발로 나와서 무안타 완봉승을 거두고, 47세의 노장이 여전히 칼날같이 건재한 컨트롤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어떤 포크볼의 달인은 그가 커브를 던지지 못한다고 비난받으며 중도하차하기도 하고, 매 경기마다 7이닝 이상을 책임져주던 강철어깨의 소유자는 마무리 투수 미션에 실패해서 지탄을 받기도 합니다. 이런 자극적이지만 흥미진진한 미션들이 이어지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들의 변신에 대중들은 왕년의 야구가 전해주었던 감동과 환희를 깨닫게 되고, 출연한 선수들은 재조명 받으며 엄청난 인기를 구가합니다.

그런데, 이런 방송들이 이어지다가 미션들 사이에 잠깐 이들이 자신의 본 장기를 보여주는 시간이 찾아온다면 야구는 잘 모르는 상태로, 이전의 경기를 접하지 못하고 그저 이 프로그램만을 통해 이 선수들을 접했던 많은 이들이 깜짝 놀라게 되지 않을까요? 이들이 진정 잘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왜 이들이 전설로, 야구계가 자랑하는 재능이었는지를 그런 전문분야에서의 본모습을 확인하고 난 뒤에야 확연하게 깨닫게 된 것이죠.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동안 잊고 있었던, 아니면 무시했었던 이 프로그램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을 가지게 되겠죠.

왜 오른손 강속구 투수가 왼손으로도 잘 던진다는 것을 자랑했어야 하는지, 활처럼 휘는 슬라이드를 결정구로 가지고 있는 투수가 왜 커브의 각이 좋지 않다고 욕을 먹었어야 했는지, 그 누구보다도 한 회를 완벽하게 틀어막을 수 있었던 끝판왕 마무리가 3이닝을 넘기면 힘이 떨어진다고 중간 탈락을 했었는지. 그들의 진정한 전문분야에서의 실력을 본 순간, 이 프로그램의 어딘가가 확실히 뒤틀려져 있다는 것. 그들은 이미 확고한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왜 굳이 어울리지 않는 옷을 매 미션마다 번갈아가며 입으면서까지 무리를 해왔을까 하는 안타까움. 그리고 그런 실력자들에게 이상한 기준으로 비난을 퍼부었을까 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한심함이 동시에 느껴지지 않을까요?

야구 전문용어가 많이 섞여 있어서 조금 불친절하고,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고 과도하게 이입시킨 잘못된 예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번 주 나는 가수다의 중간 평가를 보고 난 뒤 제 느낌도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다른 가수의 노래를 바꾸어 부르는 미션을 수행하면서, 7명의 가수들이 자신의 원곡을 도전자에 앞서 열창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왜 이렇게 훌륭한 고수들에게 그동안 어색한 옷을 강요하며 그것으로 실력을 평가했을까 하는, 이 프로그램이 시작할 때부터 지적받았던 가장 아픈 부분이 다시금 떠올랐어요. 이들에게 매번 다른 곡, 다른 미션으로 평가를 강요하는 것이, 그리고 그 결과를 두고 순위를 정하는 것이 얼마나 잔혹하고 어리석은 기준이었는지 처절하게 느껴졌던 거죠.

수많은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빼어난 원곡들. 그 노래를 그 방식으로 그 가수가 부르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미션 주제를 받자마자 많은 가수들이 인터뷰를 통해 김경호의 노래를 기피대상 1위로 뽑았습니다. 그의 개성이 너무 강하게 나타나서 다른 사람이 아무리 잘 불러도 그 이상의 감동을 주기 힘들다는 것이 이유였죠. 하지만 이런 걱정이 과연 김경호의 노래에만 해당되는 것뿐이었을까요? 부르는 사람의 개성과 매력에 맞추어, 오랜 준비 기간 동안 엄청난 고민과 수정 끝에 완성된 원곡을 고작해야 1~2주 사이의 준비과정에 맞추어 편곡하고 소화하고 무대에서 선보인다는 것은 굉장한 무리수입니다. 그것도 그 수행자가 이미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대가라면 더더욱 그렇구요. 투수들이 자신의 투구폼, 결정구, 수행하는 업무, 활약했던 시기에 따라 사용하는 근육이 다르고 단련된 부위나 습관이 다르듯이 이들 나가수에 출연하는 가수들 역시도 마찬가지란 겁니다.

바비킴의 목소리가 가진 진한 개성을 극복하기 위해 장혜진이 ‘사랑 그놈’을 애절한 발라드로 편곡해서 소화하지만, 그 매력은 자신의 명곡 ‘1994년 어느 늦은 밤’을 부를 때의 그녀의 장점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김경호가 자우림의 ‘헤이헤이헤이’를 부르며 다른 가수의 기립박수를 받아도 그의 진정한 존재감은 자신의 히트곡 ‘금지된 사랑’을 부를 때 가장 확연하게 느껴지죠. 지나친 감정과잉이라고 비난을 받는 윤민수는 바이브의 노래를 부르며 왜 자신이 빼어난 보컬리스트인지 확인시켜줍니다. 아무리 뛰어난 재해석도 원곡의 매력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 것이죠.

물론 다양한 장르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소화하는 가수들은 그 나름의 칭찬과 환호를 받아야 합니다. 나가수가 가진 가장 큰 매력도 이런 색다른 변신, 독특한 즐거움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매주 고심과 노력 끝에 변신을 거듭하는 이들의 열정과 재능은 당연히 놀랍고도 굉장한 것이죠. 하지만 이 프로그램의 장점들이 진정한 즐거움으로 다가올 수 있기 위해서는, 이런 독특함이 이들 가수들이 충분히 자신들의 매력을 뽐낼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고, 그래서 나는 가수다의 무대가 그 외의 다른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선택일 때 더욱 빛나지 않을까요? 하지만 나가수를 선택한 이들은 이젠 더 이상 자신들이 설 무대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조용히 잊혀지고 싶지 않아서,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 이 어려운 문을 두드렸습니다. 이런 괴로운 선택을 한 이들이 설혹 가끔씩 아쉬운 무대를 보여준다 해도, 가끔은 실패한 편곡, 잘못된 무대 콘셉트, 선곡의 불운 때문에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그런 부족한 부분들이 가수의 능력을 폄하하거나 비난해야 할 이유는 절대 아니라는 거예요. 이들은 이미 자신의 분야에서 오랜 시간동안 수많은 곡으로 우리에게 감동과 추억을 선물해 주었던 존중받아야 할 훌륭한 가수들이니까요.

왜 가수가 자신의 노래를 들고 무대에 서지 못하는지, 무엇이 이런 가혹한 조건을 감수하고서라도 나는 가수다에 출연을 결심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는지. 이 프로그램이 그동안 선물해주었던 숨겨진 명곡들과의 만남, 환상적인 무대들, 잊혀진 가수들의 재발견 같은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번 중간 평가는 결국 나는 가수다가 가진 가장 명백한 한계와 아쉬움을 재확인시켜주었습니다. 우린 왜 이런 기형적인 프로그램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걸까요. 원곡의 감동 뒤에 찾아온 씁쓸함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습니다. 선동렬이 왼손으로 140을 찍고, 류현진이 사이드암으로 마무리 투수의 가능성을 자랑하고, 오승환이 9이닝 2실점 완투를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감동일까요? 다르게 생각한다면 어쩌면 이런 허전함이, 그리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주는 것이 나는 가수다의 가장 큰 의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순위 가르기나 맹렬한 비난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겐 이미 이렇게나 많은 훌륭한 가수들이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 그리고 이들의 진정한 무대를 보다 많이, 자주 보고 싶다는 열망과 기대를 품는 것. 그리고 이미 '가수'인 이들에게 ‘나는 가수다’의 무대를 강요하는 지금의 기형적인 가요계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 바로 그것이에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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