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정준희 칼럼] 대한민국 정책 현안 가운데 가장 풀기 어려운 난제 중에 하나가 바로 텔레비전 방송수신료 인상안이 아닐까 한다. 정확히 말하면 조세(租稅)가 아님에도, 그 어떤 세목에 비해서도 조세저항이 큰, 원칙상 정치의 영역이 아니어야 하지만 그 어느 것보다 정치화된, 그러나 어느 정치세력에게도 총대를 멜 유인을 주지 못함으로써, 오랜 세월에 걸쳐 ‘무결정의 결정’이 요샛말로 ‘국룰(국민적 규칙, 즉 보편적으로 관습화된 불문율)’처럼 되어버린 현안.

이런저런 잡다한 고려 요인을 제하고 나면 수신료 인상의 필요성 자체는 비교적 명백하다. 첫째, 철저히 상업적인 방송 위주의 국가나 국영방송 체계를 유지하고 있는 적잖은 나라들을 제외하고, 적어도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공영방송을 주축으로 방송 시스템이 설계되어 있어서 이를 수신료라는 보편적 공공재원으로 뒷받침하는 이 또한 적잖은 나라들 가운데, 대한민국 국민 1인당 수신료는 평균값이나 중위값에 훨씬 못 미친다. 국민소득 수준까지 따지면 꽤 작은 액수다.

둘째, 미우니 고우니 해도,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수신료는 투입 대비 산출이 큰 재원이다. 선택지 없이 돈을 내야 하는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땐 효용이 0 아니면 1 사이에서 극히 다르겠지만, 사회적 효용 측면에서는 장점이 확실하다.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양질의 생산물을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마치 땅값 비싼 도심 안에 만들어진 공원처럼 이른바 긍정적 외부성(externality: 직접적 목적 이외의 부대이익)과 문화산업 전반의 규모와 품질 기준을 높이는 등의 승수효과(fiscal multiplier: 어떤 부문에 이뤄진 투자가 유효수요를 확대하여 최초 투자 이상의 소득 증대를 야기)를 불러온다.

이미지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셋째, 새로운 미디어 환경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공적 요구는 사라지지 않는다. 불량정보의 홍수 속에서 신뢰할만한 정보의 ‘섬’을 만드는 일, 우리의 눈과 귀를 틔워주는 다큐멘터리, 묵직하지만 재미도 가득한 대하사극이나 현대극, 품격 있는 담론, 공존의 가능성을 높이는 깊이 있고 따뜻한 시선,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시민성에 부합하는 창의적 접근. 여기에는 (과거보다 더 많은) 돈이 든다. 점점 더 거대해지는 자본은 결코 이런 것에 관심이 없다.

넷째, 미디어 경쟁의 격화 속에서 점점 더 많은 콘텐츠가 홍보나 상품광고와 구별되지 않는다. 전처럼 엄격히 ‘칼로 무 자르듯’ 규제를 하면 될까? 이미 ‘내용과 광고의 분리’라는 고전적 원칙은 적용하기 매우 어려운 ‘칼로 물 베기’ 조건에 도달해 있다. 어쩌면 국내 미디어 산업의 생존을 위해선 그런 현실을 불가피한 것으로 용인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이해관계에 물들지 않는 독립적인 시선, 그 자체만으로 사회적 의미와 미학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콘텐츠는 도대체 누가, 무슨 재원에 바탕을 두어 제공할 것인가?

수신료에 내재된 이런 장점에 대해서는 미디어 연관 학자들이나 시민사회 다수가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도 왜 수신료 인상 논의는 이렇게 오랜 기간 늪에 빠져 헤어날 줄 모르게 된 것인가? 이 또한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수신료의 이득을 직접 체감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발적 ‘선택’이 무한히 증대하는 듯한 현실 앞에서 수신료의 ‘(반)강제’ 징수라는 지극히 고전적인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방송 수신 단계에서 수상기 이외의 진입통제 장치를 갖지 못했던 초기 시대에는 그 비용을 광고와 수신료로 나누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뜯어봐도 지금은 도무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수신료 징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고자 하는 이들이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조직화하여 마침내 수신료를 폐지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도록 몸조심하는 게 그나마 현실적인 연착륙 전략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열거한 수신료의 장점, 정확히 말하자면 공적 재원으로 뒷받침되는 독립적 공영 미디어의 장점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현행 체제하에서 어떻게든 수신료를 조금이라도 올려보려는 노력과는 별개의 대안적 기획을 준비하는 게 바람직하다. 예컨대 이 문제를 KBS 탓으로 돌리거나 반대로 그동안 한없이 묶여만 있던 수신료 탓(과 그것을 방임한 정치권 탓)으로 돌리는 건, 둘 다 지극히 맞는 말인 동시에 큰 의미가 없다. ‘일단 올려주면 잘 해볼게’와 ‘잘 하는 거 보고 올려줄게’라는 주장이 쳇바퀴 돌 듯 맞물려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영방송이 어떻게든 잘 해서 정치권에 적절한 명분을 제공하고, 정치권에서는, 앞서 언급한 외부성과 승수효과를 고려하여, 사회적 저항감이 가능한 한 덜 생기는 방향에서, 이를테면 최소한 물가인상률에 연동시키는 방식으로라도, 확실한 재정적 대안이 나올 때까지 버티며 공영방송이 자체 혁신을 할 수 있도록 물꼬를 터준다면야 나쁠 것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환경에선 그런 흐뭇한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잘 작동하는 공적 미디어 영역을 위한 수신료 제도의 혁신

역설적인 조합일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조세성’과 ‘선택성’의 일정한 타협을 통해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최근 북유럽 등지에서 수신료를 점차 조세의 형태로 바꿔나가면서 기존 수신료 제도의 역진세적 단점까지 보완하는 방식은 공영방송의 제도적 존속을 지지하는 권역에서 차츰 현실성을 높여가고 있다. 그러나 이들 권역은 기존 공영방송에 대한 신뢰가 비교적 크고, 조세에 대한 효능감이 존재하며, 세금에 의한 지원의 형식을 띠더라도 국가나 정치가 미디어의 독립성을 침해하지 않는 전통이 있다는 점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수신료 혹은 그에 준하는 조세가 특정 공영방송(종사자)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디어 환경 전반의 건강성을 유지하고 특히 공공적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는 점을 지금보다 더 명확히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아가, 미국 독립전쟁을 촉발했던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No Representation, No Taxation)’는 표어처럼, 수신료 혹은 미디어 공공재원의 조달과 배분을 위한 기구를 설립하고, 그것은 물론 개별 공영방송의 지배구조의 실질적 대표성을 확보하는 것이 ‘조세성’ 강화의 필수요건이다.

이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혹은 적어도 전략적으로 ‘선택성’을 부여하는 것까지 고려되어야 한다. 수신료 제도는 특수 목적으로 설립된 공영방송 법인에게 그 목적 실현의 책무를 일임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재원을 국가가 조달해주기 위해 설계된 것이다. 연구자로서의 전문적인 견해를 밝히자면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이 공영 미디어의 독립성과 창의성 그리고 재원 조달과 집행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수신료 납부자, 징수자, 집행자, 정책자가 제각각 분리되어서 상호간 실질적인 소통과 점검이 이뤄지지 않는 체제에서는 그런 선한 목적이 의도된 결과로 이어진다는 인식은 점점 더 희박해지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수신료 혹은 그것에 갈음하는 조세가, 복수의 주체에 의해, 어떤 영역에서는 독자적으로 그리고 다른 영역에서는 경쟁적으로 목적을 달성하는 양상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재원의 일정 부분은 고정 비율에 따라 배분하고 나머지는 납부자의 선택에 맡기거나 공공 목적의 경합적인 배분 절차를 따르는 방식을 고려할 수 있다. 대표성 높은 기구가 만들어지면 이들이 수신료 납부자 혹은 납세자와 소통하여 그 배분율과 배분 방식을 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여기서 관건은 납부자의 선택성을 배가하여 ‘관여도’를 높이는 데 있다. 구독료와 같은 지나친 시장관계로 빠지지 않으면서도 공영 미디어와 시민 사이의 긴밀한 관계 수립을 위한 제한적 선택성을 부여해줄 창의적인 방법은 다양하다.

이렇게 저렇게 굴려 봐도 개선이 필요한 건 분명한 수신료 제도를 그간 지탱해온 현실적인 논리는, 영국의 심도 깊은 논의 사례에서 제출됐던, 그것이 그나마 “가장 덜 나쁜 선택지(the least worst option)”이더라는 것이다. 비록 조금 오래 전 일이기는 하나, 수신료 폐지까지 염두에 두고 치열한 논의를 거친 끝에 내린 이런 판단 이후에 영국이 선택했던 것은 물가인상률에 상응하는 수신료 인상이었고, 그로부터 또 몇 년이 흐른 뒤에는 디지털 혁명에 대응하는 공영방송 혁신을 위한 더 넉넉한 재원의 한시적 제공이었다. 심지어 2021년에 새로 선임된 BBC 이사장이 최근 의회에 출석하여 밝힌 의견 역시 정확히 같았다. 참고로 그는 골드만 삭스에서 23년을 근무한 이력을 지닌 은행가 출신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영국과 한국의 조건은 여러모로 다르다. 그러나 같은 것 역시 적지 않다. 공공 재원으로 뒷받침되는 공영 미디어는 생각보다 쉽게 대체되지는 않는다. 만약 대체되어도 아무런 문제없을 정도라면 그건 그 제도를 그만큼 잘못 운영해왔다는 의미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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