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스카이 IM-S110. 일명 '한예슬폰'이라 불리던 10여 년 전 내 휴대폰의 배경화면은 빈센트 반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였다. 고흐의 팬이라 배경화면을 고른 건 아니었다. 누구처럼 고흐의 작품을 유년기에 직접 관람하고 깊은 인상을 받은 적도 없고, 그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은 있었지만 동생인 테오의 이름도 몰랐다. 아는 화가가 고흐였다는 게 정답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이런 속사정에도 불구하고 휴대폰이 완전 고장 날 때까지 배경화면은 바꾸지 않았다. 배경화면을 보는 사람들은 가끔 고흐를 좋아하냐는 질문을 던졌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아마 '그렇다'라고 답했던 것 같다. 질문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고흐를 좋아한다는 이미지 정도는 심어주지 않았을까. 고흐에 관한 실제 내 관심과 보이는 모습의 괴리가 얼마큼이든 말이다. 지금 내 휴대폰 배경화면은 고흐의 작품이 아니다. 나와 고흐 사이의 괴리감은 딱 그 정도로 축소됐다.

괴리감에서 시작하는 고흐의 라쇼몽

<러빙 빈센트>는 괴리감에 관한 영화다. 영화에서 우리는 빈센트를 만날 수 없다. 빈센트의 영화지만 주인공이 빈센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수사가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다.<러빙 빈센트>는 빈센트 사망 1년 후 프랑스 아를에서 시작된다. 주인공은 우편배달부 조제프 룰랭의 아들인 아르망. 아르망은 아버지의 부탁으로 빈센트가 동생 테오에게 쓴 마지막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오베르로 향한다.

오베르에서 아르망은 여러 사람을 만나 빈센트에 대한 생각을 듣는다. 기대를 걸었던 미술상 탕기 영감. 경멸하며 악마라고 부르던 가정부 슈발리에. 천재성을 알아본 가셰 박사의 딸 마르그리트, 일상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며 따뜻한 사람이라고 기억하던 여관주인 아들린. 돌봐주고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깊이 나누었던 주치의 폴 가셰 박사. 그 외에 석연찮은 죽음과 관련되거나 오베르의 주민들까지. 이처럼 악마이자 순한 양. 광인이자 친절한 이웃. 아르망이 만난 오베르의 주민들은 어떻게든 빈센트와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며 동시에 뒤통수를 볼 수는 없는 것처럼 주민들은 단지 본인이 지켜본 빈센트의 단면을 묘사할 뿐 그의 진심과 실제에 닿을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빈센트의 1인칭 시점을 버리고 아르망이 빈센트의 주변을 탐문하는 추리극 형식을 택한 건 탁월한 구성방식이다. <러빙 빈센트>는 실체적 진실에 영원히 다다를 수 없다는 점에서 '빈센트의 라쇼몽'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러빙 빈센트>는 파편화된 빈센트의 삶을 단순히 전시하는 데서 그치고 말까. 그랬다면 영화는 단지 자살의 이유를 밝혀내는 심리극이나 범인을 잡아야 하는 평범한 추리물로 남았을 것이다. 빈센트가 마지막 순간이 궁금하기는 하나 그 이유를 명확히 밝혀 내는 건 다른 영화의 몫일 것이다. <러빙 빈센트>는 빈센트의 삶을 통해 관객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어떤 방식으로 전달해야 하는지 잊지 않는다. 타인의 단편적 시선에서 비롯된 편견에 맞서고 흔들리는 자존감 속에서 피워낸 예술혼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떻게 피어났는지 말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이 살해당한 혼령과 빙의한 주술사의 증언을 통해 진실이 밝혀지는 것처럼 <러빙 빈센트>에는 빈센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2통이 있다. 영화에서 유이(有二)하게 빈센트가 화자인 이 편지에는 평생 수백 편의 그림을 그리고도 단 한 점의 작품만 팔린 불운한 천재의 현재 처지에 대한 비관과 미래에 대한 불안함도 있지만, 훗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게 될 창작자의 위대한 예술가의 열정과 삶에 대한 낙관이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1888)을 배경으로 아름답게 펼쳐진다.

좋아하기 힘든 색이라니, 그런 건 믿지 않는다

<러빙 빈센트>는 10년 동안 107명에 달하는 아티스트가 고흐의 화풍을 그대로 재현한 62,450점의 유화 프레임을 그려 완성한 대작이다. 그런데 회상 장면은 무채색인 흑과 백으로만 처리되었다.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기 때문에 흑백을 택했다면 후기 인상파를 대표하며 원색을 주로 사용한 고흐의 화려한 색채를 전혀 살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판단이었겠지만, 연출 의도를 고려한다면 최선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이코노미스트」에서 ‘책과 미술’ 담당 편집자로 일한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가 쓴 『컬러의 말』에는 중세시대에는 여러 색의 광선을 섞어 흰색의 빛을 만들어낸다는 발상은 대역죄였고, 색의 혼합이 완전한 금기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순백의 빛은 신의 선물로 간주하였던 탓이다. 화가들에게는 실용적인 이유로 혼색이 금기시됐다. 팔레트에 여러 물감을 섞으면 점차 검은색이 되는 것처럼 혼색하면 할수록 점차 색이 탁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상 장면의 흑백이 중요하다. 고흐는 예술에는 열정적이지만 주변 관계에는 다소 무심하고, 대중들에게 인정받고 싶지만 타협은 하기 싫은 다양한 면모를 지닌 인물이다. 친구들과 시끌벅적한 모임을 하고 싶다가도 가끔은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평범한 우리들처럼. 아르망이 수집한 다양한 관찰평처럼 고흐가 지녔던 다채로운 삶의 색이 더해지면 결국 검은색이 될 테니 흑백처럼 어울리는 배색을 또 찾아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좋아하기 힘든 색이라니, 그런 건 믿지 않는다.”

‘또 다른 그린 올리브 계열 색을 변호하며(2015)’ 데이비드 호크니가 남긴 말이다. 고흐가 조금 더 타협적이고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했더라면 더 많은 걸작을 쏟아냈을까. 그보다는 그저 늦은 나이에 몽마르트르에서 미술을 공부한 경험이 있는,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못하는 화가로 사그라들었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인간 내면의 복잡한 고민을 가감 없이 캔버스에 쏟아낸 진실함이 고흐가 꾸준히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인 까닭이다.

여러 사람의 노력과 애정을 통해 지금도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고흐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 역시 고흐의 자화상을 구성하는 하나의 색일 뿐이다. 사랑하는 빈센트(Loving Vincent)에게서 온 메시지는 결국 이것이지 않을까. 좋아하기 힘든 색도 없는 것처럼 빼야 할 색도 없다. 고흐의 삶에서도 우리의 삶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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