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진민정 칼럼] 한때 ‘미투운동’이 한국 사회를 강타한 적이 있었다. 당시 많은 이들은 이 운동이 성폭력 문제를 넘어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개선하고, ‘성평등 민주주의’로 가는 발판이 되기를 염원했다. 그러나 이 운동이 과연 한국 미디어가 여성을 재현하는 방식에도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을까.

언론사에 따라서는 성평등 센터나 젠더 에디터 제도를 마련하는 등 변화의 조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먼 듯하다. 드라마나 예능, 웹툰에서 여성은 여전히 순종적이거나 수동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있고, 광고 속에서도 여성은 ‘애보고 집안일하면서 소비하는 대상’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에서 남성의 과대 대표성 역시 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계 내부의 변화도 더딘 듯하다. ‘2019 한국언론연감’에 따르면, 여성기자와 남성기자의 비율은 약 3:7 정도의 성비불균형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간부급 기자들 중에서도 여성의 비율은 낮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불균형 현상은 성차별 기사의 만연으로 이어지기 쉽다. 실제로 2020년 발표된 ‘대중매체 양성평등 내용분석 보고서-인터넷 기사’에 의하면, 성적 대상화 기사, 외모에 대한 평가, 성차별적·선정적 보도 관행 등 성차별 기사가 성평등 기사보다 월등히 많았다.

이미지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물론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서구사회에서도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는 2000년대 이후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위한 다양한 법적 조치들을 마련하고 있다. ‘의원선거와 선출직에 여성과 남성의 평등한 진출을 위한 법’(일명 동수법, 2000년), 평등법(2014년), 평등과 시민권법(2017년) 등이 그것이다. 특히 정치권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 동수제가 확대된 계기를 마련한 2014년 평등법은 미디어 내 성평등에 관한 규정을 가장 핵심적인 내용으로 두고 개정안에 적극 반영하였다. 젠더 고정관념 타파, 동수 비율, 의사결정자로서 여성의 임명 등 세 가지 주요 목표를 담고 있는 이 법에 따라 미디어에서도 여성 종사자의 비율 및 여성 출연자의 비율을 남성과 유사하게 끌어올릴 것, 콘텐츠 차원에서 여성의 이미지 개선에 기여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할 것, 임원진 구성에 여성의 비율을 높일 것 등이 요구되었다.

CSA(최고시청각위원회)의 역할 또한 확대되었다. 방송 채널들에 등장하는 여성의 비율을 조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각 프로그램에서 여성의 재현 방식을 감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양성평등법이 채택된 이후 CSA는 해마다 관련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다. 또한 2017년, 평등과 시민권법이 통과되면서 여성의 권리를 신장하기 위한 법적 조치가 더욱 강화되자 방송 광고에서의 성적 고정관념을 근절시키고 여성의 이미지를 개선시키는 임무도 부여받았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로 인해 방송 프로그램 및 방송 광고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개선되어가고 있고, 방송에서 여성, 특히 여성 전문가의 출연 비율 역시 증가하고 있으며, 관련 프로그램도 늘어나고 있다. 실제로 2016년 공영방송 경영진의 구성을 보면, 60%가 여성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성평등 사회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아 보인다. 최근 팬데믹이 장기화되며 집에 있는 시간이 늘면서 가정폭력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경제적 또는 종교적 위기가 닥치면 여성의 권리는 위험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이러한 권리는 결코 획득되지 않는다. 그러니 여성들은 자신의 권리를 위해 평생 경계를 유지해야 한다”

작가이자 여성운동가였던 시몬느 보봐르가 1908년 한 인터뷰에서 했던 발언이 다시 재조명되고 있는 이유다. 그만큼 여성의 권리는 경계를 늦추는 순간 바스러질 수 있는 한없이 연약한 권리다.

우리 사회에서도 미디어 내 성평등 실현을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양성평등기본법, 방송법 등의 관련 법률, 방송심의규정, 양성평등 방송 프로그램 제작 안내서 등 여러 가지 방안이 마련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부분을 미디어의 도덕성 혹은 여성 언론인들의 줄기찬 투쟁에 맡기고 있는 듯하다. 미디어에서 재현되는 여성의 이미지가 과거에 비해 크게 진일보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평등한 민주주의로 조금이라도 나아가려면 미디어가 사회적 결속을 강화하고 차별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미디어 내 성평등 실현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정책이 선행되어야 한다. 젠더에 관한 사회적, 문화적 규범뿐 아니라 세상에 대한 가치체계를 마련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 진민정 언론진흥재단 선임연구위원 칼럼은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언론인권통신' 제 897호에 게재됐으며 동의를 구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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