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방송국에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나란히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는 김수현 작가가 요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뿌리깊은 나무에 대해서 비아냥에 가까운 언급을 해 뜨거운 반발을 사고 있다. 김수현 작가가 트위터에 올린 글에 대한 수많은 반응을 단순화시킨다면 ‘뿌리깊은 나무’가 더 인기를 끄니 질투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시각이다. 그 진정한 속내야 김수현 작가 본인밖에는 모를 것이지만 대중 정서상 오해를 살 만한 말을 한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한창 방영 중인 자기 드라마 대본 쓰기도 바쁠 텐데 뿌리깊은 나무를 꼼꼼히도 봤다는 것이다. 김수현 작가가 지적한 부분은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글을 배우지 못했는데 어떻게 글을 읽느냐는 것이다. 냉정하게 보자면 충분히 의문을 가질 만한 부분이다. 젊은 나이에 조선제일검과 겨룰 정도의 무술을 익힌 것에 대해서는 스승 이방지가 등장했지만 똘복이가 글을 배운 장면은 없었으니 그저 가져볼 수도 있는 의문이었다. 다만 그것이 김수현 작가가 제기한 것이 화근이었다.

무협소설도 아니고 세종과 한글창제라는 엄연한 사실을 다루는 드라마에서 똘복의 눈부신 성장이 개연성을 잘 갖췄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이미 뿌리깊은 나무 인기는 이 드라마에 대한 비판을 곱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하나 김수현 작가가 놓친 부분이 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며 일국의 왕을 죽이겠다는 무모한 목적을 가진 똘복이의 집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똘복이의 아버지는 글을 읽지 못해서 죽음을 당했다. 그 한을 담은 똘복이가 아무리 변방 생활이 고되고, 무술을 익히는 것도 벅차다 할지라도 틈틈이 글을 배웠을 것이라는 것은 인물분석에 의한 상상력으로 커버가 되는 부분이다. 물론 선의의 상상력이 동원돼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선의를 갖지 않는다면 상상력보다는 딱딱한 근거 위주로 따지게 될 뿐이다.

김수현 작가는 평생을 드라마를 써온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 드라마 속 인물에 대한 구상과 분석이 뛰어날 것이다. 글을 몰라 아비를 잃은 똘복이에게 복수만큼이나 글을 깨치는 것이 절실했을 거란 생각을 못한 것은 그런 김수현 작가답지 못한 모습이다. 똘복이가 글을 배운 적 없는 노비출신이라는 사실에만 사로잡혀서 그것을 공개적으로 상대 작가 망신주기 같은 인상을 남기는 것은 대작가답지 못한 치기로 보인다. 어쩌면 노탐인지도 모를 일이다.

뿌리깊은 나무는 올해 최고의 사극일지는 몰라도 최선의 고증을 지키는 드라마는 아니다. 익히 알다시피 이 드라마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 소설은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을 덧입힌 결과물이다. 세종이 나오고, 집현전 학사들이 죽어나가지만 그것이 사실은 아니다. 밀본이라는 비밀스러운 조직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당시 한글을 반대했던 중국과 사대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강채윤도 마찬가지로 실존인물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뿌리깊은 나무는 재미를 위해서 없는 일과 인물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속 주인공과 사건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컨대 천애고아로 친척집에 맡겨진 수애는 현재 출판사 편집팀장이다. 어떻게 공부를 해서 대학을 졸업하고 그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 작가는 보여주지 않았지만 그것이 의심스러워서 딴죽을 거는 사람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근거가 아니라 수애가 젊은 나이에 치매에 걸려가고 있다는 비극적 상황이다.

그렇다면 뿌리깊은 나무에서 채윤이 언제 누구에게서 글을 배웠는가는 그다지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오해에서 비롯된 채윤의 맹목적인 복수가 어떻게 한글의 첫 번째 수혜자가 되는지에 대한 극적인 전개일 것이다. 이런 설명을 늘어놓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거꾸로 만일 후배 작가가 김수현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면 대단히 엄한 태도로 꾸짖을 것이다. 어쩌면 지적이고 품위 있는 단어가 아닌 말들로 꾸짖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런 문제제기는 좀 치사한 딴죽이다. 그것이 질투인지 아니면 김수현 작가의 노쇠함이 드러나는 슬픈 증거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작가의 아름답지 못한 노년을 보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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