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나무에는 세 개의 조선이 보인다. 하나는 왕권을 강력하게 만들려고 철권정치를 보인 태종의 조선 즉 왕의 조선이다. 그런 부왕과 맞섰던 세종의 조선은 아버지 태종과 달리 죽이는 왕이 아닌 살리는 왕이다. 군주정치에서는 쉽지 않지만 민본주의 조선을 세종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조선은 바로 밀본의 조선, 정도전의 조선이다. 이 세 개의 조선은 서로 타협할 수 없는 갈등의 존재로 아주 흥미로운 구도였다.

태종의 조선에 맞서려던 세종은 아비에게 죽음을 당할 뻔 했다. 밀본의 조선 또한 이미 태종에 의해서 탄압받아 음지로 숨어든 상태다. 그러나 태종이 없는 조선은 외관상 세종의 조선만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도전의 밀본만큼이나 비밀스러운 세종의 집현전 조직이 추진한 한글반포를 앞두고 밀본은 세종의 조직을 하나둘씩 제거해나가고 있다. 변방부터 시작된 밀본의 살인은 지금 시대라도 완전범죄가 가능한 고도의 무술에 의한 감쪽같은 솜씨였다.

세종의 명을 받아 시신의 검안을 맡은 반촌의 가리온이 그것을 오행에 따른 살인이라고 했으니 앞으로 두 명은 더 죽을지도 모를 일이다. 최소한 밀본의 목표가 다섯 명은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허담, 윤필 두 동료의 죽음을 쫓는 젊은 학사들을 통해서 넌지시 암시되었다. 두 사람의 팔뚝에도 죽은 이들과 같은 문신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아무리 조선초기라 성리학적 사고가 뿌리 깊지 않은 때라고 하지만 그래도 선비들이 자신의 몸에 문신을 한다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조선의 통치이념은 충과 효이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하나인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효는 역모와 다를 바 없는 죽을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는 효경의 가르침은 사대부가에 대단히 엄중한 계율에 해당한다. 아무리 중국과 사대부의 반대가 심했던 한글을 위한 비밀조직이라고 하더라도 세종의 학사들이 효의 기본을 어기는 문신을 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드라마 속에서도 강채윤이 집현전 학사들의 몸을 살펴 자객이 노리는 사람을 알아보겠다고 말을 했지만 부제학에게 혼쭐만 났을 뿐 검사를 할 수 없었다. 사실은 그것이 혼만 날 일이 아니라 사대부를 능욕했다는 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사극에 있어 고증은 항상 논란의 대상이지만 이는 고증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에 대한 기본 이해에 대한 문제라는 점에서 아쉬운 옥에 티지만 이 정도는 사실 애교에 불과하다.

고도의 무술을 소유한 밀본의 자객만큼이나 세종의 조직들도 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윤필은 죽기 전에 주자서에서 스스로 몇 개의 활자를 삼켜서 세종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부검이 죽은 자의 말을 듣는 일이라는 말이 있는데 가리온의 부검에 의해 발견한 쾌거였다. 칼에 베인 흔적이 없는 윤필의 시신을 부검을 통해 사인을 밝혀내기 위함이었는데, 조선 초기에 인체를 칼로 가르는 부검이 시행됐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다.

쉽게 또 다른 사극 허준을 예를 들 수 있다. 허준의 스승 유의태는 의술발전을 위해 자기 시신을 부검하라는 유언을 남기는 감동적인 장면을 남겼다. 그러나 의술에 미친 허준조차 부검을 몹시 망설이게 된다. 부검해야 할 대상이 스승의 주검이라는 점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당시에 시신이라 할지라도 칼로 몸을 가른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든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허준이 해부를 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닌 허구의 구성인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분명한 것은 조선시대에 시신을 해부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인데 그것도 왕이 직접 지시한 수사에서 공개적으로 부검이 행해졌다는 것은 조선의 통치이념과 윤리를 망각한 아주 심각한 옥에 티다. 이것은 부검의술이 존재하냐 마냐의 고증 문제가 아니라 조선을 지탱했던 근본정신에 대한 것이다. 작가들은 무의식적으로 실수를 범한다. 현재의 시각에서 과거를 본다는 것이다. 물론 재해석이란 부분에서 필요한 요소지만 때로는 시대를 오도하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뿌리깊은 나무는 시작과 함께 명품사극의 훈장을 달았다. 미드를 연상시킬 정도로 짜임새 있는 진행과 무엇보다 단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배우들의 명연기가 이 드라마를 2011년 최고의 명작이 될 것을 예감케 해주었다. 송중기, 한석규 두 세종의 서로 다른 개성이 무엇보다 이 드라마의 미덕이다. 특히 한석규가 보여주는 소탈한 세종의 모습은 현실에 불만이 많은 시청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주기에 충분했고 그만큼 칭송이 자자하다.

송중기에 이어 한석규로 시청자들의 시선이 세종에게 집중되어 세종앓이는 빠르게 퍼져가고 있다. 그렇지만 제작진은 원작의 스릴러와 장혁의 추노 브랜드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탓에 이와 같은 비역사적 상황들이 벌어지는 것 같다. 그렇다고 장혁이란 카드를 버릴 수는 없다. 다만 이 드라마를 통해서 KBS의 대왕 세종과는 다른 친근하면서도 다가가기 쉬운 욕세종의 모습을 더 보고 싶어하는 시청자의 마음은 빨리 읽어야 할 것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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