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칼럼] 새해인데 새해같지 않은 기분이다. 권력의 심부도 비슷한 분위기인 듯하다.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사는 좀 힘이 빠진 느낌이다. 5년차라는 시점이 반영된 것이겠으나 최근 상황의 특수성이 영향을 준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듯하다.

문재인 대통령 신년사의 핵심은 코로나19 회복을 통해 선도국가로의 도약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코로나19 극복은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니 선도국가 도약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가 중요하다. 내용을 뜯어보면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내이다. 이 정부가 그간 강조해 온 성장동력 키워드의 나열이다.

이게 특별히 잘못된 건 아니다. 사실상 대통령이 일할 수 있는 마지막 해에 새로운 개혁 아젠다를 던지는 건 무리한 일이다. 그렇더라도 애초 계획을 어떻게 마무리 할 것인지, 남은 개혁 과제의 선택과 집중은 어떻게 이룰 것인지를 보여주지 못한 것은 아쉽다. 오히려 올해는 논란이 될만한 정치 이슈와는 다소 거리를 두고 해야 할 일을 하겠다는 수비적 태도에 가깝다는 느낌이다.

그나마 언론이 주목한 것은 전국민 백신 무료 접종과 부동산 문제에 대한 유감 표명이다. 특히 부동산 문제는 ‘주거 안정’이라는 표현에 눈길이 간다. 대통령이 부동산 문제라 하지 않고 굳이 이 표현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부동산 문제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아파트 가격 안정을 기준으로 정책의 성패를 논하게 된다. 하지만 주거 문제라고 하면 더 넓은 분야를 포괄하는 뉘앙스다. 문재인 대통령은 공급확대를 함께 언급했는데, 부동산 가격 안정이라는 결과를 내지 않더라도 공급확대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한다.

언론은 변창흠표 공급확대 정책의 내용을 여러모로 보도하고 있다. 애초에 예상됐던 공공임대주택 등이 아닌, 고밀도 개발을 통한 아파트 분양을 추진한다는 게 핵심이다. 설 전에 국토교통부가 도심 주택공급 확대방안을 내놓을 예정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언론은 대통령이 말한 “빠르게 효과를 볼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내용의 규제완화가 실시되는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이런 해법은 기성언론이 주장해 온 공급만능론에 정부가 사실상 백기투항했다는 인상을 준다. 여당이 사실이 아니라는 해명을 했으나, 다주택자에 대한 양도세 중과가 한시적으로 완회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애초에 정권이 그렸던 부동산 정책의 틀이 무너지자 과거의 해법으로 회귀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11일 청와대에서 신년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정권이 특별히 힘을 싣고자 했던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과거 회귀는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북한은 노동당 8차 당대회를 통해 당분간 파격적 대외정책은 삼가고 국방력 강화에 힘을 싣기로 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했다는 말을 보면 국방력 강화의 실 내용은 심각한 수준이다. 핵탄두의 소형화 경량화를 통한 전술핵 개발은 명백히 남한을 겨냥한 것이다. SLBM 탑재가 가능한 전략핵잠수함 설계는 남한을 포함한 주변국들과 북핵 갈등의 수위를 계속해서 높여 가겠다는 취지다.

이러한 위협에 비하면 출구를 모색할 수 있는 공간은 매우 협소하다. 북한은 남한이 독자적으로 추진 가능한 코로나19 공동대응 모색 등의 방안을 ‘비본질적’인 것으로 못박았다. 남한이 미국을 설득해 먼저 행동에 나서도록 하지 않으면 대화 테이블에 앉지 않겠다는 태도다. 바이든 정권을 준비하는 이들은 대외정책의 우선순위에서 일단 북핵 문제를 제외하려는 분위기다. 이러면 남북 간 또 북미 간 교착상태는 길어질 수밖에 없다.

장기화되는 갈등의 빈 자리를 치고 들어오는 것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군비확장론이다. 당장 핵잠수함에는 핵잠수함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부상하고 있다. 이지스 구축함에 SM-3 등 요격미사일 도입을 앞당겨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남북이 서로를 핑계로 군비확장을 거듭하는 것은 악순환의 반복이 될텐데, 문재인 정권은 이 대목에 취약하다. 남북화해를 말하면서 동시에 국방력 강화나 무기수출 주장 자체는 거부할 수 없는 조건에 있기에 그렇다. 신년사에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가 소극적 수준으로만 표현된 것은 이런 상황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 정권이 중요시 한 또 하나의 의제는 검찰개혁이었는데, 대통령 신년사에는 “지난해 오랜 숙제였던 법 제도적인 개혁을 마침내 해냈다”는 정도의 표현이 있을 뿐이다. 이것만 놓고 본다면 검찰개혁은 이미 이뤄져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공수처 설치 외에 실제 검찰개혁이 충분한 수준까지 이뤄진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럼에도 개혁을 더 밀어 붙일 수 없게 된 것은 조국 전 장관 임명 강행 이후 1년이 넘는 시간을 불필요한 갈등을 키우고 그걸 다시 수습하는 데 허비했기 때문이다.

결국 가는 길마다 막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었거나 온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소극적인, 수비적인 자세의 대통령 신년사로 이어졌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제 차기 대권 구도에 주목하며 오지 않은 미래에 기대를 실어야 하는 국면인 것일까? 그러기엔 차기 대권주자라는 사람들이 여야 막론 믿음직하지 못하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게 큰 권력을 쥔 자의 책임이다. 하던 대로 밀고 나가라는 것이 아니다. 잘못을 바로잡을 시간이 아직 남아있다는 거다. 최근까지의 정치적 대립구도는 어느 정권이든 주류일 수 있는 사람들과 이 정권에서만 주류인 사람들끼리 서로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에 가까웠다. 이 구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정권에 남은 시간을 더 가치 있게 쓸 수 있다. 신년기자회견에서는 좀 달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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