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넌트 레이스 마지막 날이었던 10월 6일 오후 박종훈 감독이 자진 사퇴한 뒤 약 24시간이 지난 어제 오후 LG는 김기태 수석 코치를 감독으로 승격시킨다고 발표했습니다. 마무리 훈련을 앞두고 감독의 공백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한 발 빠른 조치로 볼 수도 있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우선 박종훈 감독의 사퇴 이유와 신임 김기태 감독의 임명 이유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구단 측에서는 김기태 감독이 LG의 내부 사정에 밝아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선임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김기태 감독이 LG 유니폼을 입고 있었던 것은 고작 2년에 불과합니다. LG 선수 출신도 아니며 3년에 걸친 일본 연수 및 코치 생활 후 LG 2군 감독 1년 반, 1군 수석 코치 3개월의 경력을 쌓은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LG 내부 사정에 밝은 것만 따지면 김정민, 유지현 등 프랜차이즈 출신의 코치만 못하며 감독으로서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라면 박종훈 감독이 남은 계약 기간을 채우는 것만도 못합니다.

▲ 박종훈 전 감독과 김기태 신임 감독. 김기태 감독은 성적 부진으로 사퇴한 박종훈 전 감독의 약점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박종훈 감독의 퇴진 사유는 성적 부진이었습니다. 성적 부진의 근본적 이유는 투수진을 비롯한 운영 능력의 부재였는데 박종훈 감독이 외야수 출신의 초보 감독이라는 약점에 대한 지적이 적지 않았습니다. 2004 시즌부터 LG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나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2006 시즌 중 물러난 이순철 감독 역시 외야수 출신의 초보 감독이라는 점까지 감안하면 지명 타자 출신의 초보 감독인 김기태 감독의 선임은 당장 내년 시즌 성적에 대한 의문을 자아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올 시즌 페넌트 레이스 1, 2위를 차지한 삼성 류중일 감독과 롯데 양승호 감독이 모두 초보 감독이었다는 사실에 고무된 LG 구단이 다시 초보 감독을 선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 감독 모두 전임 감독이 완성시킨 팀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호성적을 거뒀다는 사실을 LG 구단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류중일 감독은 김응룡, 선동열로 이어지며 10년 간 시스템을 완성시킨 팀을 물려받았으며 양승호 감독은 로이스터 감독이 만년 하위팀에서 포스트 시즌 단골 출전 팀으로 탈바꿈시킨 후 물려받았습니다. 게다가 류중일 감독은 삼성에서만 무려 10년 동안 코치로 몸담으며 경험을 쌓았고 양승호 감독은 스카우터와 코치로 10년 넘게 경력을 쌓았으며 LG의 감독 대행과 대학 팀의 감독 경험까지 풍부한 경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기태 감독은 한국 프로야구 불명예 기록인 포스트 시즌 진출에 9년 연속 실패한 팀을 물려받았으며 그 자신의 경력도 상대적으로 일천합니다.

김기태 감독의 선임 배경으로 LG 구단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꼽고 있지만 과연 이순철, 박종훈 감독은 카리스마가 없었기에 실패한 것인지 되묻고 싶습니다. 이순철 감독은 LG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상훈을 트레이드시킨 바 있으며, 박종훈 감독은 에이스 봉중근의 2군행을 지시하며 선수단 장악을 위해 카리스마를 앞세운 바 있습니다. 하지만 선수단을 카리스마로 찍어 누르며 무능을 감추려 했던 두 감독의 말로는 비참했습니다. 진정한 카리스마는 감독의 검증된 능력을 바탕으로 뒷받침되지만 김기태 감독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미지수입니다. 7월 31일 2군 감독에서 1군 수석 코치로 승격된 이후 팀이 부진에 빠지자 선수단 전체의 삭발을 주도한 바 있는데 과연 삭발이 성적 향상이라는 효과를 수반하는지 LG의 시즌 최종 성적을 돌이켜보면 김기태 감독 역시 삭발과 같은 구태 행위를 중시하는 과거의 카리스마로 무장한 인물이 아닐까 우려되기까지 합니다.

▲ LG 트윈스 구단 홈페이지에 공지된 김기태 감독 선임 발표. 하지만 계약 기간과 계약금, 연봉 등 조건이 밝혀지지 않은 것에서 얼마나 성급하게 임명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당장 내년에 현실화될 수도 있는 10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 실패라는 최악의 상황을 LG가 피하기 위해서는 야수 출신의 초보 감독이 아니라 한국 시리즈 우승 경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현재 감독직을 수행하지 않는 투수 출신의 경력이 풍부한 인사를 임명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었습니다. 그것은 9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 실패의 볼썽사나운 성적에도 불구하고 120만 명에 육박하는 엄청난 관중들이 잠실야구장을 찾은 열정적인 LG팬들의 강력한 바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또 다시 초보 감독이 지휘봉을 맡게 된 것에서 LG 프런트의 강력한 입김이 작용했음이 입증되었습니다. 계약 기간과 계약금, 연봉 등이 아직 공개되지 않은 것을 보면 김기태 감독의 선임이 얼마나 성급한 조치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LG는 자신들이 라이벌로 여기는 삼성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할 것입니다. 만년 2위였던 삼성은 항상 자신들에게 수모를 안기던 한국 시리즈 9회 우승의 주역 해태 김응룡 감독을 영입해 한 맺힌 한국 시리즈 첫 우승을 2002년 달성했으며 후계자 선동열 감독 취임으로 연계시키며 도합 세 번의 한국 시리즈 우승을 이룩했습니다. 김응룡 감독의 취임과 구단 사장으로의 승진을 거치며 프런트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는 시스템을 정착시킨 이후 삼성이 매년 우승을 노리는 진정한 명문 팀으로 거듭났다는 사실을 LG는 배워야할 것입니다.

LG 프런트는 SK 김성근 감독의 경질 사태와 SK 프런트에 대한 격렬한 팬들의 저항을 지켜보며 경력이 풍부한 껄끄러운 감독보다는 다루기 쉬우며 연봉 부담도 적은 인물을 감독에 앉힌 것으로 보입니다. 일부에서는 프런트와 코치직을 오가며 강력한 권한을 자랑하는 모 인사의 힘이 이번에도 강력히 작용한 것으로 추측하며 특정 학맥에 좌우되는 LG 구단의 난맥상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김기태 감독이 LG의 11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 좌절이라는 불명예 신기록을 달성할 즈음에는 계약 기간과 상관없이 성적 부진을 이유로 퇴진시켜 총알받이로 만들며 프런트는 자신들의 잘못을 면피하려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팬들의 열망을 무참히 짓밟으며 납득 불가능한 감독 인선을 자행한 LG 프런트는 더 이상 팬들이 감독만 바라볼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합니다. 당장 내년 시즌 초반부터 성적이 좋지 않을 경우 김기태 감독은 물론 김기태 감독을 앉힌 프런트는 차마 감당할 수 없는 격렬한 저항에 직면할 것입니다. 총알받이 하나로는 감당할 수 없는 팬들의 날카롭고도 집요한 칼끝을 LG 프런트가 어떻게 막아낼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입니다.

야구 평론가. 블로그 http://tomino.egloos.com/를 운영하고 있다. MBC 청룡의 푸른 유니폼을 잊지 못하고 있으며 적시타와 진루타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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