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칼럼]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한 해가 다 갔는데 윤석열 검찰총장 얘기를 아직도 하고 있다.

지난 24일 법원이 윤석열 검찰총장 징계 집행을 정지하면서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주도한 징계의 정당성은 사실상 무너졌다. 본안 소송 결과가 윤석열 검찰총장 임기 종료 이후에야 나온다는 점에서 집행정지 심문에서 징계 정당성 일부를 따졌고, 이 결과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정도의 징계 근거는 없는 것으로 판명됐기 때문이다.

법원 결정이 더 치명적인 것은 징계 절차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징계 정당성을 다루는 행정 소송에서 절차적 미비가 지적됐다는 것은 사실상 윤석열 총장 측의 승소 가능성을 높이는 결과이다. 징계위원장을 맡았던 정환중 변호사는 기피신청 대상 징계위원들이 의사정족수엔 포함되나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할 뿐이라며 법원 판단의 부당함을 주장하고 있으나 이미 결정문에 이 주장의 반론이 포함돼 있다. 검사징계법상 “의결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과 구 상법 상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은 맥락상 다른 개념이라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법원 결정 이후 사실상의 대국민 사과를 했고 검찰에도 공정하고 절제된 검찰권 행사를 주문했다. 검찰개혁의 정당성은 잃지 않으면서 윤석열 검찰총장과의 대립구도에서는 벗어나겠다는 의사를 피력한 걸로 볼 수 있다. 이후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문재인 대통령과 독대를 하고 이미 사의를 표명한 추미애 장관 사표 수리 시점과 맥락 등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오가는 것도 이 문제의 ‘출구전략’을 모색하는 신호로 읽힌다. 더불어민주당이 ‘검찰개혁 시즌2’를 하겠다며 수사와 기소의 분리 등 제도개혁에 힘을 싣는 것도 마찬가지다. 윤석열 검찰총장과의 대립구도에 매몰돼 검찰개혁의 본질에서 멀어진 것 아니냐는 비판을 수용하는 분위기인 것이다.

그러나 윤석열 검찰총장과의 대립 구도를 더 적극적으로 연장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는 듯하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두관 의원이다. 김두관 의원은 여러 지적에도 불구 윤석열 검찰총장 탄핵론에 연일 불을 붙이고 있다. 검사징계위가 이미 정직 2개월을 의결한 탓에 헌법재판소가 기각할 거라는 지적엔 특검이나 공수처 수사를 통해 헌법재판소를 설득해야 한다고도 했다.

공수처는 겨우 처장 후보자 추천이 완료됐을 뿐이고 특검도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닌데, 지지율 하락 국면과 4월 재보선이 끼어있는 상태에서 이를 추진할 정치적 동력이 있다고 보는 것인지 의문이다. 김두관 의원이 이런 판단을 못할 것으로 생각되진 않으니 결국 잿밥에 관심이 있는 거 아니냐는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추미애 장관이 본인이 말하는 대로 검찰개혁을 하다 산산조각이 났으니, 그 뒤를 이어 검찰개혁의 기수를 자임해 핵심 지지층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 대권으로 가겠다는 취지 아니냐는 거다.

마찬가지로 대권을 노리는 추미애 장관 입장에서 이것은 죽 쒀서 개 주는 일이다.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수습할 수 없는 정치적 법적 부담을 안겼다는 점에서 자숙해야 하는 처지임에도 소셜미디어에 문장 몇 개를 남기고 윤석열 검찰총장 탄핵을 주장하는 칼럼을 인용한 것은 이런 이유일 것이다.

이런 경쟁구도가 만들어진다면 법무부 장관직은 어찌되겠는가? 이미 사의를 밝혔으니 인사권자의 뜻에 따르는 수밖에 없지만, 임무를 완수했다는 명분으로 흔쾌히 직을 내려놓는 것과 경질에 가까운 모양새가 되는 건 전혀 다른 얘기다. 추미애 장관이 버티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후자에 가까운 상황이 되고 이것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또다른 부담이다.

즉, 김두관 의원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두관 의원이 굳이 선명한 개혁성으로 승부를 보고 싶다면 차라리 ‘누더기’가 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과 같은 문제에서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김두관 더불어민주당 의원 (연합뉴스)

그런데, 정치인들이 자기 유리한 대로 사건을 이용한 결과가 이렇게 된 이유는 결국 이런 방향을 요구하는 대중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같은 문제가 정경심 교수 1심 판결에 대한 반응에서도 보이는데, 재판부에 속한 판사들을 탄핵하자거나 법관을 선거를 통해 선출해 ‘민주적 통제’를 해야 된다거나 하는 주장이 나오는 게 그렇다.

법관 선출 제도는 미국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그 시작은 특정 정파에 의해 장악된 의회의 법관 임명을 포함한 입법권을 견제하자는 취지였다. 미국에서도 이 제도는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것으로 평가되는 추세이다. 선출권을 가진 대중이 어떤 방식으로 정파화돼 있느냐에 따라서 사법부의 판결이 비일관되게 이뤄질 수 있고, 이익단체 등에 의한 부패 역시 더 심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기 떄문이다.

그런데 지금 제기되는 법관 선출론이나 판사 탄핵 주장은 이런 사례와도 다르다. 언론과 사법부, 검찰과 보수정치가 하나의 거대한 카르텔을 이루고 있으므로 이를 견제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런 주장은 전통적인 민주 대 반민주 구도의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우리 사회 일반에 민주적 원리는 지속적으로 확대 적용해나가야 한다. 문제는 민주 대 반민주 구도가 이를 명분으로 특정 정파의 당파성만을 보장하는 기제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대중이 여당에 등을 돌린 상황에 정경심 교수 항소심에서 1심 판결이 뒤집힌다면, 그런 경우에도 법관 선출은 필요한가? 아닐 것이다. 사법부 판단을 존중하고 현명한 판결에 감사한다는 모범답안이 유력하다.

결국 현실 정치에서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가 ‘불편부당’한 정치적 공간을 제공한다는 식의 서사는 법을 넘나들며 학벌을 대물림하고 재산을 불리는 행위를 정당화 할 수 있는, 재산이 50억 넘는 계층의 당파성에 동원될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는 언제 어디에나 적용 가능한 제도적 틀의 고안이 아니라 정치세력 각자가 대의하는 당파성의 경합으로 실현돼왔다. 하지만 이 정권에서 엘리트에 대한 ‘민주적 통제’라는 개념은 ‘우리 편에 유리한 것’으로 호도되는 것에 가까워졌다. 그 결론은 이 정권의 당파성만이 ‘표준’이라는 것이다.

장기간 계속된 윤석열 검찰에 대한 정권의 공격이 검사들의 부정부패나 약자에 대한 횡포 등에 초점을 맞췄다면 다른 평가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여당이 주장해 온 윤석열 검찰의 주된 희생자들은 자기들 스스로도 인정하는 초엘리트계층의 일원이거나 말 한마디로 세상을 뒤흔들 수 있는 정치적 힘을 갖춘 사람들뿐이다. 어떤 면에서 이런 현실은 촛불시위의 이미 예정되었던 정치적 최후인 듯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제는 최소한의 정상적 통치로 물러날 때다. 집권 5년차에도 누굴 몰아내자는 얘길 하는 통치의 미래는 어둡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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