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지평을 넓혀온 귀한 방송인 사유리가 한국사회에 ‘자발적 비혼 출산’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최근 사유리는 외국 정자 은행을 통해 정자를 기증 받아 일본에서 아들을 출산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다양한 관점의 발언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이런 의견이 눈에 띈다.

‘아버지 없이 자랄 아이가 불쌍하다’

당장은 법적인 아버지가 없는 사유리의 자녀가 불행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불행해진다면 저런 발언을 마음대로 뱉는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위의 의견들에 따르면 <자기 앞의 생> 주인공 모모(이브라히마 게예 役)는 불행의 조건을 충족했다. 친부는 누군지 모르고 친모와도 겨우 세 살에 이별했다. 고향인 세네갈을 떠나 피붙이 하나 없는 프랑스 땅에서 호의에만 의지해 생활 중이다. 가난은 아이를 일찍 철들게 한다. 사회에 대한 불만과 어른에 대한 불신만 가득한 모모는 결국 마약유통책이 되어 서서히 어긋나기 시작한다.

그런 모모 앞에 로자 아줌마(소피아 로렌 役)가 등장한다. 반항기가 있는 모모에게는 다소 쌀쌀맞고 엄격한 로자 아줌마지만, 사실은 창부의 아이들을 돌봐주는 따뜻한 면도 있고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아픈 기억도 가진 다층적인 사람이다. 무엇보다 모모에게 ‘믿는다’는 말을 가장 자주하는 사람이다. 엄마도 없는 철든 아이, 엄마만 있는 아이들의 엄마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영화 <자기 앞의 생>

<자기 앞의 생>이 선택한 소설과의 차별화 전략

<자기 앞의 생> 같은 영화들을 접하면 이율배반적인 감정에 휩싸인다. 감동할 준비가 되어있기도 하고, 쉽게 감동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평생 한 번만 받을 수 있다는 프랑스의 공쿠르상을 유일하게 두 차례 수상한 세계적인 작가 로맹 가리의 대표작이라는 명성 앞에서는 온전히 감상을 밀고나가기도 어렵다. 아마 제작자도 같은 고민이었을 것이다. 원작에 휘둘리지 않지만 주제의식은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 활자매체인 소설이 아니라 영상매체인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 다행히 <자기 앞의 생>은 절묘한 균형점을 찾았다.

영화가 소설을 뛰어넘기 위해 택한 건 모모의 패션이다. 모모는 땀띠가 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만큼 큼직한 헤드폰을 목에 두르고 앙상한 팔뚝이 훤히 드러난 단벌 민소매 티셔츠만 입는다. 마치 세상에 귀를 닫아버리고 누구에게도 소맷자락 하나 내주지 않겠다는 듯이. 또 하나의 중요한 소품은 가방이다. 모모의 가방에는 동네의 중독자들에게 부지런히 전달할 마약만 실려 다닐 뿐. 책, 장난감, 도시락처럼 또래의 아이들이 넣고 다닐만한 물건은 담기지 않는다.

‘어른의 부재’라는 연출도 소설과 영화를 구분 짓는 특징이다. 모모의 생활에서 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되는 만 15세에서 60세 사이 가량의 어른들이 놀랄 만큼 보이지 않는다. 모모를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로자 아줌마, 코엔 박사, 하밀 아저씨는 되레 젊은이들에게 보살핌을 받아야 할 노인들이다. 로자 아줌마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롤라가 눈에 띄지만 트랜스젠더 미혼모다. 롤라의 성별이 문제가 아니라 매춘부를 12살 아이의 롤모델로 삼아도 된다는 사회통념은 아직 받아들이기 이르다.

영화 <자기 앞의 생>

경찰이라는 공권력이 아주 잠시 등장하지만 로자 아줌마의 집을 대충 훑어보고 떠난 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보호 받아야 할 모모의 행방을 궁금해 실종신고를 한다거나 사회안전망을 통해 도움을 주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모모를 인격체로 대하는 어른은 마약공급상 뿐이다. 모모의 방황이 쉽사리 끝나지 않는 이유는 가난보다 다가올 날이 더 나아지려는 희망의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절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로자 아줌마와 모모는 경찰의 시선을 피해 지하실로 숨어든다. 이 장면에서 영화 <기생충>에서 부잣집 지하로 들어가 자신의 모든 흔적을 지운 기택의 모습이 겹쳐지는 건 우연일까. 물론 원작 소설에서도 둘은 지하실을 찾는다. 습하고 어둡지만 공간에서 오히려 안도감을 느끼는 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공유하는 편안한 절망감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기생충>의 장면은 오래된 미래처럼 느껴진다. 어쨌든 그곳에서 로자 아줌마는 생의 마지막 불꽃을 밝히며 모모에게 희망의 싹을 심고, 모모는 로자 아줌마의 믿음과 사랑의 온기를 통해 변화의 싹을 틔운다.

영화 <자기 앞의 생>

모모의 춤은 잘못이 없다

모모에게 ‘춤’은 중요한 기억이다. 영화에서는 춤이 세 번 등장한다. 엄마의 춤을 바라봤다는 어린 시절의 기억. 로자 아줌마와 롤라가 춤추는 모습을 숨어서 지켜 볼 때. 그리고 클럽에서 우연히 만난 마약공급상과의 춤. 같은 춤이지만 의미는 다르다. 어떤 춤은 아련한 추억이고, 다른 춤은 안정감에 대한 동경. 또 다른 춤은 위험한 세계로의 유혹이다. 춤은 잘못이 없다. 어디서 누구와 추느냐가 문제일 뿐.

멘토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로자 아줌마가 모모와 인연을 맺어준 하밀 아저씨는 『레 미제라블』에 나온 선과 악에 대한 잠언을 한 가지 말해준다. ‘선과 악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에 달렸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모모는 로자 아줌마를 처음 만났을 때 한 달 월세 정도의 가치가 있다는 그녀의 촛대를 훔쳐 달아났다. 잘못된 장소에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과 춤을 출 수도 있다. 그럴 때 죄송하다고 반성할 수 있는 시간까지 기다려주는 게 어른들의 역할이 아닐까. 아이는 아무리 철이 들어도 아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로자 아줌마의 장례식에서 모모는 평소와 다른 옷을 입고 있다. 단정한 단추와 깨끗하고 하얀 카라가 달린 셔츠. 혹한까지 견디기는 어렵겠지만 어느 정도의 추위는 막을 수 있는 모자가 달린 도톰한 후드점퍼. 귀를 덮고도 남을 커다란 헤드폰은 벗어둔 채다. 무엇이 모모를 바꾼 것일까. ‘불행의 조건’ 따위를 만들어 읊어대는 어른일까. 도움을 청하고 세상에 귀를 열 준비가 된 아이에게 손을 내미는 어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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