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아마도 배우 김혜수의 다음 인생작이 등장하기 전까지 <내가 죽던 날>은 오래도록 김혜수의 인생작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성숙한 자태에 앳된 목소리로 청소년 시절부터 이미 조선의 여인상을 연기했던 김혜수는 이후 세련된 헤어와 옷차림으로 대표적인 도시 여인의 대명사가 되었고, 붉은색 입술을 진하게 바른 채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명대사를 남기며 섹시한 여배우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배우, 특히 '여배우'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사람, 그래서 유수 영화제에서 사회를 보는 것이 잘 어울리는 스타. 그런데 <내가 죽던 날>에선 배우가 아닌 ‘사람’ 김혜수의 냄새가 맡아진다.

하지만 <내가 죽던 날>을 그저 배우 김혜수가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만 기억하는 건 아쉽다. 지난 2008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여고생이다>로 최우수상을 수상한 박지완 감독의 장편 데뷔작 <내가 죽던 날>은 21세기의 고립된 '관계'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닥칠 수 있는 삶의 위기에 대한 '위로'를 담아냈다는 점에서 2020년이 길어낸 '힐링' 영화가 아닐까 싶다.

관계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방출된 사람들

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 이미지

이야기는 형사 현수(김혜수 분)로부터 시작된다. 병가를 내고 휴직 중이었던 현수는 복직을 하고자 한다. 그녀는 괜찮다지만 상관부터 친구이자 동료까지 그녀의 이른 복직을 우려한다.

그도 그럴 것이, 휴직 이전까지 변호사이던 남편을 두고 직무에 있어서도 승승장구하던 현수, 하지만 그녀가 가졌던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렸다. 승진을 앞두고 임신을 미루자던 그녀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일 만큼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남편에게는 다른 여자가 있었고, 현수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그녀에게 이혼을 요청한 남편은 그 이유로 외려 그녀와 후배 형사와의 돈독한 관계를 '불륜'이라며 문제 삼았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닥친 일들, 현수는 어떻게든 의연하게 버텨내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날 유치원 하원 버스와 차량 충돌을 일으킨 현수. 그 이유는 감각을 잃어버린 그녀의 팔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닥친 심리적 충격이 신체적 증상으로 드러난 것이다. 자기 팔의 무감각을 견디지 못해 자해까지 하게 된 현수는 결국 휴직을 하게 되었고, 이제 다시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복직을 하고자 한다.

그렇게 아직은 이르다는 복직을 하려는 현수에게 맡겨진 사건은 태풍이 몰아치던 밤 절벽 끝에서 사라진 소녀 세진에 대한 보고서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평범한 여고생이었던 세진(노정의 분). 하지만 그저 부자인 줄 알았던 아버지가 탈세 사건에 연루되었고, 묻혀질 뻔한 아버지가 저지른 범죄의 증인이 된 소녀. 그래서 경찰은 세진을 증인 보호라는 명목으로 외딴 섬에 안치한다. 그런데 세진이 어느 날 사라져버린 것이다.

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 이미지

사건을 조사해가던 현수는 세진의 사건에 집착하게 된다. 그건 바로 세진의 '보호'를 명목으로 설치한 CCTV에 잡힌, 그리고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세진의 행적에서 바로 현수 자신의 현재가 자꾸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남들과 다르지 않은, 아니 남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삶을 살다 하루아침에 그 삶에서 방출된 세진이 처한 처지가, 그럼에도 어떻게든 섬에서 살아보고자 애쓰는 모습이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벌어진 사건에 어떻게든 잡혀 먹지 않고 버텨보려는, 그래서 남들이 말리는데도 이른 복직을 하며 현실의 삶에 자신을 끼워 넣으려는 현수 자신의 모습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건을 놓치 못할수록 바로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세상의 모든 관계로부터 방출된 듯한 세진의 절망감에 현수는 고통스러워한다.

그렇게 현수가 세진의 사건을 통해 세상이 자꾸 밀어내는 듯한 절망감에 빠져드는 가운데 또 한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세진이 살았던 섬 사람이지만 섬 사람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천댁(이정은 분)이다.

예전에는 다른 섬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던 순천댁. 하지만 동생이 죽고, 그 동생의 하나밖에 없는 딸마저 세상을 멀리하려 하는 사건을 겪으며 스스로 세상과 자신을 단절한 채 살아왔다. 가족이었던 사람들을 잃어버릴 뻔한 과정에서 목소리마저 잃어버린 순천댁은 섬 사람이었지만 '그림자'처럼 살아간다.

방출된 현수와 세진에게 내밀어진 손

<내가 죽던 날>은 이렇게 각자 벌어진 사건을 계기로 '세상'에서, 그들이 맺었던 ‘관계’에서 방출된 세 사람 현수, 세진, 순천댁의 이야기를 세진의 실종 사건을 매개로 풀어낸다.

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 이미지

우리는 한 사람의 존재로 세상을 살아가지만, 우리를 우리답게 만들어 주는 건 점과 같은 존재인 우리를 엮어주고 이어주는 관계들이다. 하지만, 그 매듭들은 견고했으면 하는 우리의 갈망과는 달리 헐겁다. 꽉 묶인 매듭인 줄 알았는데 하염없이 풀어져 버려 다시 내 존재를 '점'으로 만들어 버리는 관계들. 그렇게 관계에서 풀려난 존재는 고립무원의 점이 되어 자신이 세상 밖으로 던져진 것처럼 상실감에 시달린다.

영화는 그럼에도 어떻게든 자신에게 닥친 운명에서 도망치지 않으려 애쓰는 현수와 세진, 그리고 순천댁의 삶을 그려낸다.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각자에게 휘몰아친 여러 사건 속에서 그들은 견디고 버티려 한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팔을 자해하면서까지 현수는 세상에 자신을 끼워 넣으려 한다. 세진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렇게 애를 쓰면 쓸수록 더 세상이 자신을 밀어내려 하는 것 같다. 현수도, 세진도 그 막막함에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뒤척이고 발버둥친다. 그리고 그 발버둥친 노력의 끝에서 '절벽 실종'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영화는 눈 밝은 관객의 예상과 다르지 않게 흘러간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지 않은 전개에도 불구하고 그 내밀어진 '손'이 주는 위로가 뭉클하다. 그건 <내가 죽던 날>이 사건이 아니라, 현수와 세진 그리고 순천댁이라는 주요 인물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관객은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 세 배우의 울림 있는 연기를 통해 우리 시대의 증후군과도 같은 '존재의 상실감'을 진득하게 따라가게 된다. 그리하여 그 끝에서 '연대'의 실마리를 펼쳐낸다.

다르지만 결국 같았던 세 사람. 나풀거리는 점 같은 존재들이 세상에서 떨궈지는 것도 한순간이지만, 동시에 그 점 같은 존재를 세상에 다시 묶어주는 실낱같은 '인연'도 그렇게 다시 우리를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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