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혜공주는 그날 일찍 일어나 소복으로 갈아입고 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동생의 왕좌를 강탈해간 수양대군 앞에 석고대죄의 자세로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온 진심을 다 끌어내기 위해 울지도 않고 그를 향한 충성의 음성으로 ‘전하’라 불렀다. 서럽기로는 죽기를 각오한 사육신만 못할 리 없는 경혜공주였다. 국문장에서 자신을 군주로 섬기겠다는 징표로 전하라고 부르기만 해도 살려주겠다는 세조를 향해 오히려 ‘나리’라 불러 의기를 지켰던 사육신만한 분노가 그녀에게 없을 리 없다.

그러나 경혜공주는 온 마음을 다해 세조에게 ‘전하’라는 죽어도 입에 담지 못할 단어를 달콤한 것이라도 되는 양 보여주었다. 흐뭇해하는 세조. 그 득의양양한 미소 앞에 경혜공주는 때를 놓치지 않으려는 간절함으로 제발 정종을 살려주고 대신 자신과 함께 유배를 보내달라 간청한다. 평생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숨죽이고 살아갈 것이라고 말을 한다. 전날 사육신들로부터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며 자신에게 ‘나리’라 불렀던 기억에 심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세조는 경혜공주의 ‘전하’라는 말에 큰 보상이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경혜로서는 인격적 자살과도 같은 결단이었다. 말 그대로 죽음보다 더 혹독한 생존을 택했다.

사실상 정종이 역모에 가담했기 때문에 그 처인 경혜공주 역시 같은 죄를 묻는 것이 당연한 그 시대였으나, 아무리 피로 물든 용좌에 앉았지만 조카딸을 죽이기란 세조로서도 쉽지 않은 터였다. 역사를 떠나 적어도 드라마 상으로는 그런 해석이 된다. 그냥 그런 마음으로 정종의 목숨을 부지시켰다면 좋았겠지만 세조는 기어이 경혜공주의 굴복을 보고서야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거기서 또 한발 가볍게 다시 역모를 하게 되면 조카딸인 경혜공주 눈앞에서 찢어죽일 거란 정떨어지는 소리를 더했다.

어쩌면 계유정난을 거쳐 왕이 된 후까지 자기 딸로부터 받은 저항과 반발에 대한 분풀이를 못나게도 조카에게 해대는 것일 수도 있다. 사실 그런 딸을 번번이 용서하는 모습이 수많은 목숨을 수구문 밖에 쌓이게 한 세조의 다른 면이기도 하다. 권력에 도전하거나 그것을 부인하는 일은 군주의 자식이라고 해서 용서되지 못했던 시절임을 감안한다면 가뜩이나 권력의 정통성 문제로 불안한 세조가 그런 세령을 줄곧 용서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어쨌든 다른 한편으로는 더 기가 막힌 일들이 진행됐다. 정종과 사육신들이 처형당하기 전날 김승유는 파옥을 위해 한성부를 침입한다. 여기에도 세령이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 신면을 만나러 왔다는 핑계를 대고 김승유를 한성부 안까지 무사히 데려갈 수 있었고, 파옥의 가장 큰 걸림돌인 신면을 빼돌리는 작전을 꾸몄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을 신면도 미리 간파하고 있었고, 순순히 세령을 따라 궐로 따라가면서 부하를 시켜 옥을 지키던 병사들마저 물리게 했다.

존경하는 스승과 평생을 같이 한 벗을 그렇게라도 구하고 싶던 것이었다. 비록 난세에 휩쓸려 사제와 붕우의 정을 외면해야 했던 신면의 마지막 양심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파옥을 원치 않았다. 소위 사대부들의 지나친 강직이었다. 목숨을 연명하기보다는 죽음으로써 세조의 부당함을 역사에 남기겠다는 의지로 자신들을 구하러 온 김승유의 발길을 돌리게 했다. 그리고 그 소식은 경혜공주에게 전해졌다.

다음날 아침 경혜공주는 소복을 하고 세조에게 석고대죄로써 정종의 목숨을 구명하였다. 차마 견딜 수 없는 수모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 모든 일들을 경혜는 감당했다. 그리고 참형장으로 끌려가던 도중에 정종은 대열에서 빠지게 됐다. 그러자 정종은 마치 다 살리고 저만 죽는다는 것처럼 바닥을 뒹굴며 절규한다. 왜 나만 살리느냐. 나도 죽이라며 몸부림치다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오열하는 정종의 등을 조심스레 토닥이는 손이 있다.

경혜는 정종에게 “나를 두고 죽으려 하셨습니까”하며 그 억장 무너지는 역설의 상황을 전환하려 했다. 정종은 그런 경혜에게 “이대로 날 죽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경혜는 “수치스럽게 해드려 송구합니다. 허나 부디 저를 위해 살아주십시오. 살아만 계셔주십시오.” 한다. 정종은 “오늘만, 오늘만은 마마가 밉습니다.” 한다. 그런 정종을 경혜는 끌어안는다. 그리고 그때까지 참아왔던 눈물을 몰래 흘린다.

신념이 강하기로는 경혜공주 역시 사육신만 못하지 않다. 그런 경혜가 세조에게 무릎을 꿇어가며 정종의 목숨을 살리려 했는지는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 마당에 부부해로나 꿈꾸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단지 살아만 있어야 할 이유가 경혜공주에게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곧바로 이어진다. 사육신을 처형한 세조와 그 일당은 창덕궁에 유폐된 단종을 역모의 수괴로 단정하고 영월로 유배를 보낸다. 상왕의 지위도 박탈하여 노산군으로 신분으로 격하된 채 어린 단종은 오욕의 땅으로 보내졌다.

이런 상황에서 단종에게 멀리서나마 누이와 매부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에 위안이 될 것이다. 단종의 신하로서 죽겠다는 정종을 말린 경혜는 속으로 아직은 신하로서 살아 있는 것이 더 큰 충성이라고 말하고 있을 것 같다. 살아있는 것이 견디지 못할 수치지만 그것조차 견뎌내는 것이 충심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 같다. 그것은 외로운 단종의 누나로서 그리고 신하로서의 경혜의 마음일 것이며 그렇게 단종을 지키는 마음이 또 다른 저항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이 서러운 두 사람은 그렇게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시대에 끌려가고 있다. 그 아픔을 참 절절히 잘 전달하는 이민우, 홍수현 두 배우를 보면 괜한 눈물도 흘리게 된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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