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산에 다녀왔습니다. 봄이면 봄대로 여름이면 여름대로 사시사철 산과 뗄 수 없는 생활이 산중 삶입니다. 여름 장마가 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가로막는 유일한 장애물입니다. 비 그치는 틈틈이 산을 다녀오긴 하지만 올해처럼 틈을 주지 않고 내리는 비에는 산에 갈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겨우 비 그치고 반가운 해가 나왔습니다. 긴 우기로 집안도 눅눅하고 빨래하고 말리는 일도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햇볕이 나오자 할 일이 갑자기 많아졌습니다. 눅눅한 이불 널어야 하고, 밀린 빨래해야 하고, 풀들은 비만 내리면 쑥쑥 자라있는 통에 땅콩, 고추가 풀 속에 덮여 있습니다. 할 일을 정리하면 몇 가지 없지만 햇볕이 있을 때 해야 한다는 분주한 마음만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닙니다.

멈추지 않는 여름비에 산열매들이 잘 달려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이맘때면 해마다 한가방씩 열매를 주는 돌복숭아나무를 만나러 산에 갔습니다. 산열매들은 한 해 잘 열리면 다음 해엔 조금밖에 열리지 않는 해걸이를 꼬박꼬박 합니다. 하지만 열매가 잘 열리지 않으면 올해는 봄 날씨가 추워서 그랬나, 지난해 꿀벌이 다 죽어서 그랬나, 올여름에 비가 많이 와서 그랬나 하며 열매가 몇 개 없는 아쉬움을 달래는 버릇이 있습니다. 지난해 돌복숭아가 많이 열렸는지 기억에 없지만 어렵게 찾아간 돌복숭아 나무엔 열매가 몇 개씩만 달려있습니다.

올해 산열매는 흉작이 충분히 예견되었습니다. 긴 장마는 열매가 맺히고 자라는 데 도움보다 어려움을 많이 줍니다. 꽃 수정하는 것도 방해하고 겨우 달린 어린 열매가 비바람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적든 많든 주는 대로 먹어야 하는 것이 산중 삶이다 보니 몇 개 달린 돌복숭아를 따고 돌아오는 길에 더덕 세 뿌리, 당귀 세 뿌리 캤습니다.

유난히 긴 장마로 산속에 살면서 산을 다니지 못한 올해가 되어서야 "왜 산에 사는가?"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왜 산에 사냐?'고.

그때마다 빙그레 웃거나 세상 부적응자라 산에 산다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처음부터 산에서 태어나 산에 살았다면 왜 산에 사느냐는 물음이 생기지도 않았겠지만 일부러 찾아와 살았으니 분명 이유가 있겠지요. 하지만 세상사는 이유가 항상 거창하고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직장 때문에, 태어나 자란 곳이기 때문에 부산에 살고 서울에 살듯이 누구나 가지는 이유일 때가 더 많은 법입니다. 높고 힘든 산을 오르는 산악인에게 "왜 산을 오르냐?'고 물으면 '산이 있으니까 오른다'는 당연하면서도 그 안에 깊은 뜻이 있는 듯한 답을 듣곤 합니다.

'산이 저기 있고 내가 여기 있어서' 저 산을 내가 오르는 그런 삶을 살고자 산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내 삶과 산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산과 내가 하나인 산중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지리산에 어떤 염원이나 뜻이 있어 지리산에 사는 것도 아닙니다. 삶에서 먹고 사는 일과 여가와 놀이가 분리만 되지 않는다면 뒷동산이어도 괜찮았습니다. 특별하지는 않지만 바다나 평야보다 산을 조금 더 좋아한 이유로 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채, 지리산에서 겉으론 태연하고 침착했을지 몰라도 마음속에서는 퍼내도 퍼내도 끊이지 않는 물음이 남아있는 채로 산중 삶을 시작했습니다.

이 끊이지 않는 물음이 언제 끝날까? 끝이 있기나 하는 걸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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